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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작가-정

 

김종영미술관장 최종태


김종영미술관은 예술가이자 교육자로서 평생 일관된 자세를 유지한 우성 김종영 선생의 뜻을 기려 젊고 유능한 예술가를 발굴, 격려 하기 위한 사업으로 <오늘의 작가> 전을 마련하였습니다.

 

우리 미술관은 매년 두 명 이상의 자기세계가 분명하고 작업의욕이 투철한 작가를 <오늘의 작가>로 선정, 이들의 개인전을 마련해 줌으로써 1990년부터 우성 김종영기념사업회가 시행하고 있는 ‘우성 김종영조각상’과 함께 한국조각의 발전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고자합니다.


<오늘의 작가>는 조각분야에서 작업성과가 현저하거나 장래가 촉망되는 작가를 미술관이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기준을 통해 엄선합니다. 이 제도는 젊은 작가들의 창작의욕을 고취시키고 이들에게 작품발표의 장을 제공하는데 목적이 있으므로 후학의 양성에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기울였던 김종영 선생의 뜻에 부응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올해 처음으로 개최하는 첫 번째 <오늘의 작가>인 정현은 철로를 받치는 침목(枕木)을 재료로 강인하며 견고한 인체를 표현함으로써 주목받은 바 있습니다. 침목은 그 성질에 있어서 조각의 재료로 적절치 않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는 그것을 전기톱으로 자르거나 표면에 선명하고 예리한 흠집을 내는 방법을 통해 인체의 기본적인 형태만 표현함으로써 인체조각의 전통을 바꿔놓았습니다. 정현의 침목조각은 비단 예상치 않은 재료를 사용했다는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그 물질이 지닌 상징성으로도 관심을 끄는 것임에 분명합니다. 이를테면 오랜 세월에 걸쳐 그 위를 지나쳤을 기차의 육중한 하중을 견뎌내며 비, 바람, 먼지, 기름때를 받아들인 침목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드러나지 않는 ‘인내(忍耐)의 침묵’에 대해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번 <오늘의 작가> 전시를 준비하며 정현은 아스팔트라는 또 하나의 낯선 재료와 맞서고 있습니다. 석유아스팔트로 불려지는 이 인공적인 문명의 산물은 유전에서 석유를 정제하고 남은 검은 색의 찌꺼기인 탄화수소화합물을 일컫습니다. 접착력이 높지만 온도에 민감한 아스팔트는 도로포장이나 건축용 재료로 많이 활용되고 있지만 조각의 재료로 사용된 예는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도로보수를 위해 포클레인 등으로 파헤친 아스팔트 덩어리를 수집, 그라인드와 같은 도구를 이용하여 자르거나 표면에 예리하게 절개된 자국을 내는 방법으로 누워있는 인체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몇 개의 덩어리가 모여 구성된 인체는 마치 ‘큰 바위 얼굴’처럼 자연 풍경에서 인간의 형상을 찾고자 하는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그의 작품은 시점에 따라 달리 보이는 특징이 있습니다. 위에서 내려다 볼 때 누워있는 인간의 형태를 발견할 수 있지만, 자세를 낮춘시점으로 보면 넓은 바다 위에 떠있는 바위섬의 군락(群落)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인체와 자연의 형태를 동시에 지닌 그의 작품은 침목으로 제작한 작품처럼 견고한 덩어리와 날것으로서의 물질이 만들어내는 ‘생명의 형태’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비단 조각에서뿐만 아니라 드로잉에서도 정현은 활달하며 힘에 넘친 선과 색채의 대비를 통해 인간의 머리로부터 솟구치는 정신의 에너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정현의 작품은 일면 거칠고 단순하지만 그것에서 스스로 생성되고 소멸하는 자연의 과정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정현의 작품에서 볼 수있는 이러한 특성은 김종영 선생이 강조했던 “예술은 한정된 공간에 무한의 질서를 설정하는 것”이란 아포리즘과 일맥상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미술관은 정현이 김종영 선생이 추구한 세계와 그 정신을 계승한 작가로 판단한 것입니다. 김종영미술관이 의욕적으로 마련한 <오늘의 작가>전이 한국조각의 발전을 위해 작은 역할이나마 담당할 수 있도록 많은 격려와 지도편달을 부탁드립니다.


정현 그리고 조각의 긍정
 

김 원 방  


정현의 조각에서의 '인체'

정현의 조각은 일반적으로 '인체조각'이라고 규정되어 왔다. 이는 잘못된 생각은 아니다. 92년 첫 개인전 때 보여준 작업, 2000년 전후에 철도침목을 가지고 한 작업, 이번 김종영미술관의 '오늘의 작가' 개인전에서 보여준 도로포장용 아스팔트콘크리트(일명 '아스콘')를 이용한 작업, 그리고 드로잉에 이르기까지 인체의 형상은 그의 작업에서 분명히 인지되는 특징이다. 작가 역시 자신의 작업이 인체조각으로부터 출발했었고 지금도 여전히 인체조각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그는 "나는 조각작업을 통해 인간과 인체를 새롭게 해석해 보려 한다 (...) 인체를 통해 할 게 많다. 인체는 한 물 간게 아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또한 "위기와 절망의 상황에 대처하는 인간의 실존적 모습",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한 꺼풀 벗겨낸 자화상" 등도 그의 조각에 대해 많이 나오는 해석들이다. 때로는 '인고'(忍苦)같은 표현도 제기된다. 특히 오래된 철도침목을 재료로 한 조각에 대해서는 이것이 일종의 "기나긴 인고의 시간" 같은 것과 관계있다고 말하여지기도 한다. 정현 자신도 "침목은 그 자체가 작품이며, 자갈에 찢기고 위에서는 기차가 짓누르는 가운데 비바람과 눈보라를 맞으며 수십년을 버텨온 침목 자체가 이미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라고 말했다.
물론 정현의 조각이 인체와 실존의 문제에 관련되어 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여기에는 상당한 보충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무엇보다도 정현의 조각에서 첫번째로 주목할 점은 그의 조각에 나타난 인체와 실존의 측면, 달리 말하면 형상적이고 인간중심주의적인(anthropomorphic) 측면이 결코 그의 조각이 지향하는 최종목표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에게 있어 인체의 형상은 항상 모호하게 언뜻 언뜻 나타나는 정도이며, 점토를 삽이나 각목으로 때리고 눌러서 석고로 떠낸 작업, 그리고 도끼와 전기톱으로 조각해 낸 침목작업과 이번의 아스팔트콘크리트 작업에서 보듯이, 인체형상은 재료에 대한 격렬한 조각행위 속에 거의 묻혀 버리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인체의 형상 및 인간중심주의적 측면은 정현조각의 부분적 측면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되며, 이러한 부분적 측면의 위상을 비평적으로 서술하는 일이야 말로 정현의 조각이 지니는 특징을 가늠해보기 위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이는 '정현 조각은 어디까지 인체조각인가', '그 인체성이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에게서 인체형상을 빼면 나머지는 무엇이란 말인가' 등과 같은 질문을 통해, 그의 작업을 '인체/비-인체', 또는 '조각의 현존/조각의 부재'라고 하는 구조화된 경계들의 역동적 변화 속에서 읽어내는 일이 될 것이다.


조각의 댄스, 무대, 그리고 '고스란한 조각'

정현은 프랑스 유학 시절 한국에서 하던 사실주의적 조각을 그만두고 그 대신, 각목, 쇳덩이, 삽을 사용하여 점토를 거칠게 성형하기 시작한다. 이를 그는 "아카데믹한 조각에서 떠나는 분기점"으로 생각했다. 이제 그는 인체를 "단지 대상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는데 이러한 방향전환에 의해 그의 조각은 인체의 재현이라는 목적론에서 벗어나, '단지 인체라고 하는 최소한의 조건 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유희'와 같은 성격을 띄게 된다. 여기서 "인체는 단지 대상일 뿐"이라는 그의 말은, 인체의 형상을 최종의 목적으로 간주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완전히 떠나지도 않는다는 의미이다. 정현의 기존작업은 물론, 아스팔트콘크리트 덩어리를 전기톱으로 난폭히 떼어낸 이번 작업에서도 비록 모호하지만 마치 시신과도 같은 인체의 윤곽이 남아 있다. 그것은 어떻게 바라보면 단지 돌무더기의 나열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으로서, 일종의 '최소한도로 후퇴한 인체조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후퇴에 반비례해서 새로이 부각되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은 인체와 인간중심주의라고 하는 인식론적이고 '예지적'인(intelligible) 차원에 의해 누락되었던 주변적 요소들이다. 그것은 바로 물질에 가해지는 힘과 이에 저항하는 물질, 이 양자 사이의 격렬하게 뒤엉킨 댄스 같은 것이다. 압축된 잡석의 무더기, 이를 깊숙히 뚫고 베어내기, 아스팔트와 잡석 덩어리의 잘려진 단면들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소위 '재료의 미학', '재료의 표정' 같은 것이 그의 조각의 전부라면 그건 앵포르멜이나 추상조각의 미학과 하등 다를게 없을 것이다. 정현 조각의 독특한 점은 바로 이것 -- 그러한 물질(재료)과의 댄스에 장소와 한계를 동시에 부여하는 일종의 '무대'가 있다는 점이다. 그 무대가 바로 인체의 형상이며 물질과의 댄스는 오직 이 무대 위에서만 진행된다. 그럼으로써 그의 조각은 형상성과 물질성, 정신과 몸, 이 양자 중 어느 하나로도 극단적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이 양자 모두를 보존한다. 이 '양자 모두임' -- 나는 이것을 일종의 '고스란한 조각'(Whole Sculpture)으로 명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조각의 그러한 존재론적 차원을 우리는 '조각성'(The Sculptural)이라고 개념화 시킬 수 있을 것이다.


'고스란한 조각'의 사이버네틱스 -- 인체에서 몸으로

물질과의 격렬한 댄스의 지향점은 인체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 인체형상이란 단지 정현이라는 댄서가 그어 놓은 임시무대일 뿐이며, 댄서의 임무가 무대의 형태를 모방하는데 있지 않듯이, 무대는 단지 댄서의 에로틱한 운동의 와중에서 간헐적으로 또 우발적으로 언뜻언뜻 그 경계가 감지될 뿐이다. '고스란한 조각이 지니는 총체성'(이는 총체예술Gesamtkunstwerk 같은 개념과는 관련이 없다)은 바로 댄스와 그 무대, 조각재료의 미학과 이 재료들이 재현하는 형상, 이 모두를 동시에 보존한 결과이다. 정현의 조각은 일단 형태적인 면에서 격렬하거나 실존주의적인 인고의 과정을 연상케 하지만,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실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바는 바로 그 고스란한 보존을 지속시키기 위한 댄스의 격렬함과 인고이다. 그것은 바로 조각 자체의 격렬함이며 인고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스란한 조각의 장(場)에서 인간이 발견되는 두가지 통로가 있다. 하나는 '재현된 인간의 형상' 즉 '인체'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인체형상 및 재료와 동시에 춤추는 댄서이다(즉 작가와 관객의 주체). 전자가 하나의 시지각적 대상에 불과한데 반하여, 후자는 오직 '나'라는 1인칭으로서만, '지금 이곳'이라는 현존성으로서만 주어진다. 후자는 '지금 바로 앞의 아스팔트 덩어리의 들쑥날쑥한 날카로운 굴곡에 감각적으로 몰입하고 있는 매우 직접적 참여자로서의 나'인 것이다.
정현은 전에 침목작업을 할 당시 "과연 이 재료를 이겨낼 수 있을까?"라고 자문하곤 했다. 이러한 표현과 아울러 조각가들은 종종 "재료가 저항한다"라는 표현도 사용하곤 한다. 이러한 표현은 결코 물질의 자연상태를 인공적 형태로 뒤바꿔 버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남근적 문화와는 관계가 없는 표현이다. 반대로 이겨낸다, 저항한다 등의 표현은 차가운 시각중심주의를 넘어서 대상과 신체적 감각을 주고 받는, 일종의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를 그렇게 표현하는 조각가들의 현장용어이다. 정현은 바로 그 조각적 사이버네틱스의 현장을 가장 끈질기게 보존하고 고스란히 부각시키는 작가이다.
결국 정현의 조각에 있어 핵심은 인체의 문제가 아닌 몸(신체)의 문제이고, 이 몸은 보이지는 않지만 나와 대상이 서로 얽혀서 격렬한 상호교환을 일으키는 현존적 장(場) 전체를 의미한다. 물질에 가해진 중량의 흔적, 물질의 버팀, 곧 무너질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균형의 순간, 그 와중에서도 정현의 물질들은 끊임없이 그 누군가의 얼굴이나 포즈를 모방하려는 듯한 둔탁한 몸부림을 일으킨다. 원래 조각이란 그러한 이중적 과정, 즉 '재현과 이에 저항하는 물질 사이의 결코 일방적이지 않은 상호작용(interaction)'에 대한 것이었다(미켈란젤로Michelangelo와 메다르도 로쏘Medardo Rosso를 상기해 보라). 그러나 미술사에 있어 거의 대다수의 조각은 그 어느 한쪽의 극단적 승리를 추구해 나갔다. 사실주의적 조각의 경우처럼 '그 누군가의 인체', '그 어떤 행위를 하는 포즈', '그 어떤 역사적 사건' 등의 인식론적 목표를 위해 조각의 사이버네틱한 작동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버리거나, 아니면 반대로 미니멀아트에서와 같이 일체의 형상을 제거하고 물질 자체를 과잉된 자의식적 상태로서 드러내 주거나 말이다. 정현은 이러한 두가지 극단들이 서로 엉켜있는 현장을 그대로 보존한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 의미의 인체조각은 마치 사전(事前, pre-)에 그 자리에 이미 있었거나(그래서 마치 현재의 모습은 그 인체형상이 파괴된 양상으로 인식되는), 또는 반대로 사후(事後, post)에 성취될 예정인(그래서 마치 얼마 후면 사실적 인체조각으로 완성될 것으로 기대되는), 이러한 이중의 방식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이 사전성과 사후성의 동시성, 이 접점을 끈질기게 지속시키는 것, 바로 이것이 정현 조각의 변함없는 과제인 것이다. 그러한 실로 불안정한 접점으로서의 조각이 바로 '조각의 사실성'(reality of sculpture)이며 '고스란한 조각' 이라는 것이다.
조각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는 정현이 동시에 병행하고 있는 드로잉에도 적용되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마치 조각을 하듯 하는 드로잉이기 때문이다. 얼핏 보기에는 인간의 머리의 형상인 것 같지만 그것을 격렬히 눌러 그린 힘의 흔적, 끈끈한 콜타르 잉크, 반복적인 선과 잉크의 뭉게짐, 그리고 그 '머리'로부터의 에너지의 분출 등, 이 모든 것이 조각에서의 날카로운 도끼나 톱날 자국처럼 생리학적 흥분과 맥동의 느낌을 만들어 낸다. 정현은 여기서도 인간의 머리의 형상을 단지 '주어진 대상'으로 삼을 뿐이다. 정현의 드로잉들은 '그 어떤 에너지가 분출하고 있는 머리'같아 보이지만, 그것은 격렬한 신체적 사이버네틱스의 와중에서 간헐적으로 감지되는 무대의 경계선에 불과하다. 정현의 드로잉니 지니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일종의 영화적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이다. 많은 수의 드로잉들을 연속적으로 한 릴의 필름처럼 진열하여, 하나하나만 보면 멈추어진 영화의 스틸같지만 연속적으로 읽어나가면 머이브리지Muybridge의 인체사진이나, 활동요지경(Zootrope)을 보는 듯한 운동감이 생겨난다. 이러한 운동감은 나의 전신의 생리학적 감각을 동원해서 읽어 낸 아니 체감해 낸 결과이며 그것이 바로 정현 작업의 사이버네틱스인 것이다.


조각의 긍정을 향하여

나는 이번 개인전이 정현에게 일반적으로 따라붙던 몇몇 비평적 수사들이, 사라지기보다는 좀더 풍부히 재해석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예를 들면 "인체조각을 고집스럽게 추구하는 근성있는 작가"라든지 "부조리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울한 인간의 자화상" 등과 같은 수사들 말이다. 비평이론적으로 보면 단지 주제론(Thematics)적 담론에 불과한 이러한 수사들에 대해, 조각 자체에 대한 그의 깊은 성찰과 직감, 초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상이한 실험들을 꿰뚫는 커다란 대 전제 등, 정현 만의 독창적 접근법이 주목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가 왜 '인체만 만드는 구시대의 조각가가 아닌, 조각의 매우 전위적인 실험자인가'라는 놀라운 성찰을 갖게 된다.
그의 조각은 형태의 미학이나 낭만적 상징 같은 것에 지배되기 쉬운 인체조각에 대해, 중층적 읽기의 가능성과 신체적 사이버네틱스를 부각시킴으로서 '조각 자체의 힘'과 '조각의 진정한 사실성'으로 되돌아 간다. 그것은 바로 니이체가 말하는 '긍정'(affirmation)을 지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긍정이란 인정, 설득 같은 이성적 행위가 아니라, 처음의 위치로 되돌아 감으로써 본래의 손상되지 않은 총체성을 고스란히 회복한다고 하는 그러한 신체적 운동이 수반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정현은 바로 조각 자체에 대한 긍정을 통해서, 또 그 긍정의 재긍정을 위해서 매순간 다시 조각을 개시하는 반복의 조각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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