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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의 조각과 드로잉에 대한 평론. ‘영문판 번역’으로 표시한 글은 영문판을 바탕으로 옮긴 번역이어서 한국어 원문과 표현이 다를 수 있으며, 영문판은 영어 페이지(EN)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하찮은 것과 폐기물에 담긴 인체 혹은 생명성 - 정현론 윤범모 · 미술평론가
몇 가지의 풍경 혹은 버려진 것들과의 만남
2006년 10월,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기획전시장 홀, 오랜 세월동안 숱한 기차들을 온몸으로 떠받들었던 침목(枕木)들이 서있다. 그들은 허허벌판에서 누워있다가 뭔가의 계시를 받았는지 미술관 안방으로 달려와 우뚝 서있는 것이다. 그들의 함성은 과천의 산골짜기를 가득 메웠다. 주어진 역할을 끝내고 일생을 마감한 이들 침목에게 다시 생명성을 부여한 이는 정현, 바로 국립현대미술관이 ‘올해의 작가’로 선정한 주인공이다. 주인공은 침목을 높이 3미터 정도로 다듬어 도열시켜 놓았다. 이들 40개의 구조물은 드넓은 공간을 압도하면서 미술관의 상식을 깨트렸다. 조소작품하면 으레 청동이나 화강석 같은 고상한 재료로만 이루어지는 것으로 통용되는 미술판에서 하나의 파격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침목은 한마디로 선로의 토대로 질주하는 기차를 위해 헌신했던 것, 남을 위해 자신의 존재를 죽이면서 희생이라는 미담을 자아냈던 것, 사용될 때나 폐기될 때나 인간사회로부터 무심한 대우를 받는 하나의 나무덩어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제 시대가 바뀌어 침목은 폐기물처럼 버려지는 존재로 추락하고 있다. 이 폐기물에 따뜻한 시선을 보낸 이가 있으니 바로 올해의 작가로 선정된 정현이다. 이같은 사실을 확인시켜 준 자리가 바로 미술관 회고전이었다.
침목의 작품 제목은 <무제>, 하지만 그들 침목은 인간의 하체를 연상시킨다. 작은 삽입물을 끼고 있는 두 개의 기둥은 영락없는 인간의 하체이다. 이들 하체는 중요한 부분인 몸통을 생략했고 특히 머리부분을 방기했다. 재료가 안고 있는 인고(忍苦)의 세월과 숱한 상처는 우아함과 거리가 먼 버려진 나무에 불과했다. 거칠고 볼품없는 나무토막, 그것은 어두운 색깔과 함께 상처투성이로 고단했던 세월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한 침목이, 평생을 누워만 있던 나무들이, 이제 떼를 이루어 같은 방향으로 도열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상체를 잃은, 아니 상체를 버린 체 무엇인가 상징성을 자아낸다. 이들 구조물은 물질화되는, 날로 육신화되는 인간사회를 반영한다. 영적(靈的) 세계는 방출당하고 육적(肉的) 세계만이 득세를 하는 세태를 연상한다. 그것도 너무 육중하여 때로 위압감을 자아낼 정도이다. 상체가 없는 이들 우람한 하체의 도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004년 6월, 장소 김종영미술관, 포장도로를 덮고 있다 용도가 끝나 폐기된 아스팔트 콘크리트(아스콘)가 미술관의 전시장 바닥을 차지하고 있다. 도로포장의 폐기물을 미술관으로 끌고 온 사람은 바로 정현이다. 그는 김종영미술관이 선정한 ‘오늘의 작가’로 주목을 받아 기념 개인전을 개최한 것. 이 전시에서도 작가는 고상한 작품 재료들을 외면하고 폐기물을 이끌고 온 것이다. 아스콘은 석유를 정제하고 남은 검은 찌꺼기를 일컫는다. 이는 도로포장용으로 즐겨 사용되어 도시를 온통 검은 색의 공간으로 만드는데 일조했다. 하지만 공사 등의 이유로 포장도로가 파헤쳐질 때, 아스콘은 폐기물이 되어 처치곤란의 푸대접을 받는다. 이들 버려지는 폐기물을 작가는 수습하여 다시 생명성을 부여했다. 검은 덩어리를 적당히 자르고 손질하여 바닥에 늘어트려 놓았다. 이는 다도해의 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물론 누워있는 인체의 모습이다. 모래 위에 자리 잡은 폐기물, 재탄생의 현장이다. 뿐만 아니라 거기서 강인한 생명력을 환기한다. 인공미(人工美)의 전형으로 자랑하는 교토(京都)의 용안사(龍安寺) 석정(石庭), 그것은 모래밭을 갈퀴질하여 남은 선 위에 크고 작은 열 다섯 개의 돌들을 적당히 배치한 인위적 정원이다. 일본미의 상징 혹은 선심(禪心)의 조형적 발현으로 상찬의 목소리가 크다. 돌의 배치가 마음 심(心)자와 같다더니 근래의 한 연구에 의하면 돌의 배치가 카시오피아 별자리와 같아 아예 우주의 정원이라고 격상시키려 한다. 모래와 돌의 배치, 이를 두고 후세 사람들은 의미부여를 엄청나게 하고 있다. 일본미를 그런 식으로 집약 표현할 수 있다니! 그런 미를 좋다고 해야 할까, 싫다고 해야 할까, 나는 할 말을 잃는다.
모래 위에 놓여있는 돌덩어리들, 한쪽은 너무 고상한 척 폼을 잡아 자꾸만 현학적으로 접근하여 인간의 땀 냄새를 포기하도록 유도한다. 모래 위에 놓여 있는 폐기물 아스콘으로 이루어진 모습은 인간의 존재 혹은 물질의 본성을 반추하게 한다. 그 같은 본질에 내포된 덕목은 바로 인간의 내음이다. 그 중에서도 용도 폐기되어 버려진 것들, 모양도 볼품없어 아무도 돌보지 않는 것들, 이렇듯 추하고 쓸모없는 것들에게 다시 생명성을 부여하다니! 정현의 작품은 바로 인간 형상 즉 생명성의 회귀에 연결된다.
하찮게 보이는 것과 생명성 부여
대학시절 정현은 사회 현실과 무관한 모더니즘의 세례를 듬뿍 받았다. 학생시절의 회의감은 방황으로 이어졌다. 그렇다고 그는 학생운동의 현장을 지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고급미술’의 메카라는 프랑스 유학의 길을 선택하여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축하고자 다짐했다. 하지만 그의 귀국전은 의외의 작품으로 채워 관심을 이끌었다. 인간을 주제로 설정했지만 거기에는 이른바 인체의 아름다움이 무시되어 있었다. 팔등신의 미인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수의 이탈리아 출신 작가들처럼 고급 석재를 이용한 우아한 인체도 아니었다. 형상을 무시한 것 이외 그가 택한 재료는 마닐라 삼과 석고를 이용한 이른바 ‘상품 가치’가 없는 초라한 인간들(?)이었다. 기왕의 프랑스 출신과 다른 이같은 출발은 정현의 작가활동에 무엇인가 파격을 기대하게 했다. 그의 주제는 인간, 이는 청년세대부터 장년세대에 이르기까지 변함없는 탐구 사항이다. 더불어 선택되는 재료는 고급 재료가 아닌 한물간 싸구려 혹은 폐기물같은 볼품없는 것들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이루는 재료는 침목, 아스콘, 석탄, 막돌 같이 하찮은 것들이다.
정현은 같은 돌이라 해도 화강암이나 대리석 같은 고급석재보다 아무데서나 쉽게 주을 수 있는 막돌을 즐겨 선택한다. 건축 자재로도 사용할 수 없는 이른바 쓸모없는 돌덩어리다. 이들 막돌은 모양도 없지만 결조차 일정하지 않아 다루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불규칙한 성질의 돌을 통하여 작가는 우연성을 발견하게 되고, 또 작업과정에서 조형성을 구축하게 된다. 처음부터 작가의 의지를 고집하기보다 재료를 다루는 과정에서 재료의 성질을 이해하고 상호 조화의 접점을 찾는다. 이는 탄광에서 직접 구입한 석탄덩어리 작업도 마찬가지이다. 제멋대로 생긴 석탄덩어리와 시간을 지내다 보면 언제가 나름대로의 형상을 도출하게 마련이다. 작가는 이들 볼품 없는, 다른 조소작가는 결코 관심조차 두지 않는 하찮은 재료와 교감하면서 새로운 생명 탄생의 길을 모색한다. 작가는 말한다.
“청동이나 대리석만이 완성된 조각작품의 재료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많은 조각가들이 석고를 쓰지만 이를 습작 재료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석고가 주는 풋풋함도 좋았다. 돈이 없었던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침목, 아스콘, 막돌 모두 하찮고 별 볼일 없는 것들이고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모두들 시련이 있는 것들이고, 폐기처분되는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 가공되지 않은 날 것 같은 생생한 속성이 마음에 들었다.”(국립현대미술관 발행의 도록에서)
정현은 별 볼일 없는 것들, 특히 시련이 있으면서도 가공되지 않은 날 것의 속성에 애정의 눈길을 주었다. 시련과 날 것, 이는 중요한 개념이다. 그러니까 “버려진 침목을 본 순간 레일 아래에서 육중한 무게와 비바람을 묵묵히 견뎌온 인고의 세월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마치 침목이 한 인간이자 역사처럼 다가온 것이다.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폐품이지만 거대한 에너지가 녹아있는 듯 보였다”고 그는 고백한다. 폐기물이었던 침목이 이제 하나의 인간으로 승화되는가 하면, 하나의 역사로까지 부상되어 에너지의 원천처럼 부활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침목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도 아니다. 그는 다시 말한다. “98년부터 침목 작업에 본격적으로 들어갔는데 막상 작업을 해보니 침목의 속성은 안 보이고 나만 보였다. 이것은 내가 재료와 맞붙거나 재료를 이기려고 한 것이다. 이건 아니구나 싶었다. 내 의욕만 강했던 것이다. 침목도 살고 나도 살 수 있으려면 침목의 좋은 속성을 잘 이해하며 놀아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상성과 물질성, 정신과 몸 그 어느 쪽으로의 극단적 환원이 아니라 조화로 보면 좋겠다.” 정현은 확실하게 자신의 진로를 깨닫고 있었다. 거기에는 재료와 더불어 놀며 친화하는 자세, 작위적 형상의 부여 즉 만들어지는 의미보다 자연스럽게 함유되는 상징의 세계를 지향했던 것이다.
상처받은 인체 혹은 인간 본성의 모습
별 볼일 없는 재료를 다루는 작가는 작업과정도 우아할 수 없다. 거친 재료는 과도한 노동력과 때로 과감한 접근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인체작업은 유미주의의 관점에서건 리얼리즘의 관점에서건 나름대로의 형상을 존중해왔다. 구태의연한 아카데미 분위기의 작업은 본질과 무관하게 나약함을 안기기도 한다. 내면 깊숙이 잠재해 있는 속성과 만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같은 번민은 무엇보다 형태를 부시는 일부터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추상미술의 교지를 받드는 것도 아니면서 형태를 삭제하고 생략하는 작업은 무엇인가 새로운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 노력의 결과였다. 점차 작가는 재료를 거칠게 다루면서 혹은 난폭하게 처리하면서 나름대로의 형상을 만들었다. 일견 그들 작품은 가공되지 않은 원광석처럼 보인다. 하나의 돌덩어리나 석탄덩어리처럼 특별한 가공의 흔적을 ‘남발’하지 않는다. 재료의 속성을 존중하면서 최소한의 가공만 남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작가의 육성처럼 날 것의 상태를 동경하며 새로운 에너지를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날 것이 주는 신선함, 그것은 무한한 가능성의 출발지점이다. 거기서 야성(野性)의 싱싱한 메시지를 습득한다. 이는 장식적으로 예쁘게만 꾸미려는 보통의 조소작품과 차별상을 갖는 하나의 변별점이기도 하다.
사실 미술판에서 인체는 한 물 간 구닥다리 취급을 당해왔다. 이는 표현방식의 문제와 바라보는 관점의 문제에 기인한다. 인간이라는 주제는 이 땅에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한 소재일 수밖에 없다. 인간에게 있어 인간보다 더 소중한 예술적 소재가 어디 있겠는가. 해석의 방법과 예술적 반응이 문제일 것이다. 정현은 시종일관 인체를 작품세계의 원천으로 삼으며 인간의 본질문제에 천착하려 한다. 재현적 수준에서 인체를 바라보려는 고답적인 미술동네에서 벗어나 그는 인체를 통하여 정신을 이야기하려 한다. 그러다보니 당연한 결과로 형상성이 약화되고 하나의 덩어리로서 본질의 실체만 남게된다. 그의 인체작품에서 언뜻 인체의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도 이와같은 맥락의 결과이리라.
정현은 콜탈을 사용하여 상당수의 드로잉 작업을 해왔다. 신문지나 골판지 같은 폐지를 사용하여 인체를 형상화하기도 했다. 콜탈은 희석제에 따라 농도를 달리하여 드로잉의 효과를 뒷받침해준다. 드로잉 속의 인체는 강인하고 생명으로 약동하는 모습을 지니고 있다. 표현하는 재료와 소재가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화면효과를 낸다. 두상을 그린 그의 드로잉, 머리위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있다. 일종의 기(氣)이다. 어떤 것은 푸른 색의 풀이기도 하다. 생명성을 의미한다.
거친 작업 그러나 섬세한 성품
정현은 섬세함과 거칠음이라는 이중적 요소를 구비한 작가이다. 침목, 아스콘, 석탄, 막돌과 같은 거친 재료를 다룬다하여 거친 성격의 소유자는 결코 아니다. 아니 그는 의아할 정도로 섬세하면서도 다감한 성품을 지닌 작가이다. 그의 특장 가운데 하나는 바로 생선요리의 전문가라는 점이다. 생선 요리의 섬세함은 마치 프랑스 와인의 맛처럼 미세한 미각의 발달을 요구한다. 생선요리의 달인인 정현은 그렇다고 고급생선만 선호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오히려 잡어를 좋아한다. 새벽의 노량진 수산시장이 그의 주요 산책처로 부상되어 있는 것처럼 정현은 미감(美感)을 위해 미감(味感)을 훈련하고 실천한다. 그는 잡어회를 좋아하듯 생활 속의 밑바닥에서 무엇인가 하찮은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일식당에서 결코 메인 디쉬로 오를 수 없는 잡어 이른바 ‘쯔기다시’를 선호한다. 정현의 예술은 우아하고 화려한 고급요리접시가 아니라 허드레로 내놓는 ‘쯔기다시 미학’과 연결된다. 그래서 그는 폐기물인 침목이나 아스콘으로 인간을, 그렇다, 거대한 주제인 인간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형상을 삭제하고 본질과 대결하면서 새로운 생명성을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생명 탄생에는 섬세한 손길이 필요하리라.
2007년 11월, 장소 안산의 경기도미술관. 최근 신축건물을 마련하여 개관한 경기도미술관은 건물 입구에 거대한 작품 <목전주>를 구입했다. 17미터가 넘는 6개의 전봇대를 세운 경이적인 대작이다. 작가는 정현, 원래 이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당시 미술관의 입구를 지킨 바 있다. 그후 경기도미술관의 한 기획전에 초대되었다가, 썰렁한 미술관 환경과 조화를 이룬다하여 장기 설치중이다가 근래 구입결정을 한 것이다. 하늘을 향하여 쭉쭉 뻗은 이 전봇대는 사찰의 당간지주와 같고 아니면 예전의 성역을 지키던 솟대와도 같다. 분명한 것은 미술관의 랜드 마크로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전봇대 역시 한 시대를 풍미하다가 이제 용도가 폐기된 물건이다. 하지만 이렇듯 거대한 나무기둥도 함께 모여 하늘을 떠받치고 있으니 하나의 상징성을 일구어 낸다. 이는 달라스의 현대미술관 입구에 설치되어 있는 리차드 세라의 거대한 철판 설치작품과도 다른 분위기를 유도한다. 철판은 계획된 의도에 의한 산업사회의 찬가와 같다. 하지만 유구한 세월동안 굴하지 않고 버팅겨 온 이 땅의 민초들처럼 전신주는 옹골차다. 전봇대 역시 하늘을 향하여 굴하지 않고 계속 일어서는 민초들의 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무는 하늘을 향하여 우뚝 서있을 때 아름답다. 누워있던 침목도 우뚝 설 때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이들은 모두 인간의 또 다른 면모를 환기시키며, 인간 본성의 탐구를 위한 척도노릇을 하기도 한다. 폐기물이나 하찮은 것들을 활용하여 새롭게 인체를 해석하고 더불어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기, 정현의 작업은 이와 같은 의미에서도 주목을 끈다.
비주체의 소중한 본질을 위한 정동적 조각 채은영 · 큐레이터 · 2019, 인천문화재단·인천아트플랫폼
수출입을 위한 항구, 철길, 공항을 가진 인천에서 살다보면, 운전을 하다 혹은 길을 걷다 거대한 컨테이너나 산업재료를 가득 실은 트럭을 자주 만난다. 트럭이 지나갈 때 아주 미세하지만 땅바닥이 슬며시 아래로 내려가고 트럭-기계에서 나오는 소리, 먼지와 경유 냄새 그리고 싣고 있는 재료들(원목, 고철 쓰레기, 수출용 차 등)의 형상, 냄새, 삐그덕 거리는 소리 등 비주체들이 뭉뚱그려 훅 들어온다. 대부분 안전을 위협받은 짧은 놀람이나 두려움으로 지나치곤 하지만,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면 몸의 이곳저곳의 감각과 연결된 정서까지 섬세하게 생생하게 드러나는 것에 깜짝 놀란다.
작가 정현의 폐침목 작업은 어린 시절 철길에서 일상적으로 느꼈던 이러한 기억에서 총체적인 감각과 정서를 담고 있다. 혹독한 시련의 과정을 거친 폐침목의 흔적에서 ‘겪음의 깊이’와 정서를 발견한 작가는 낮고 보이지 않는 하찮은 것들에 대해 가치를 드러내고 높이는 작업을 한다. 관람객은 첫 번째로 마주하는 메마르고 거친 시각적 형상이 주는 낯설고 어둡고 쓸쓸한 감정뿐 아니라, 경제적 쓸모를 다한 존재가 담고 있는 지난 시간 속 삶의 과정을 상상하고 사유한다. 겪음의 깊이를 가진 비주체들과 만나는 순간의 시공간은 예술을 문화적 향유와 취미로 만나는 일상적인 차원이 아닌, 여러 주체와 비주체의 시간과 공간이 복잡하게 횡단하는 차원을 요구한다.
작가는 어린 시절 경험했던 폐침목에선 본질을, 오래되어 어둡고 침침했던 청관에선 깊이를 발견했다. 대학 시절 접했던 은율 탈춤에선 개인과 사회에 대한 의식의 형성을 시작했고 밴댕이, 망둥이 같은 생선에선 제철 신선함이 주는 소중한 의미를 깨달았다. 이러한 4가지는 작가가 자란 지역의 장소성과 관계하지만, 작가는 ‘고향’으로써 지역적 소재와 역사성을 재현하거나, ‘마계’로써 지역의 부재와 결핍을 비판하지 않는다. 대신 세계 속 주체로서의 인간과 삶의 본질을 고민하고 예술가로서 삶을 스스로 조직하는데 좀 더 집중했다.
폐침목, 청관, 은율탈춤, 생선이 가진 타자성을 생각해보니, 인간과 비인간, 장소와 비장소, 주체와 비주체, 자연과 문화, 사물과 생물 등 인간 중심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벗어날 수 있는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작가가 인간의 본질과 깊이에 집중해온 것은 인간과 자본 중심의 세계에서 주체로서 인간의 본질이라기 보단, 수평적이고 관계적 태도에서 있었지만 보이지 않았던 존재들 간의 이해와 해석을 기반으로 한 세계를 위한 실천을 위한 것이다. 사물, 공간, 문화, 생물 등 인간과 자본에 의해 가려진 비주체들이 가진 소중한 본질을 드러내는 순간과 과정을 함께 하는 장소성을 위한 시공간을 담은 작업인 것이다.
문화예술교육이나 생활문화에서 지역 공동체 중심으로 밝고 착한 감상과 체험의 매개로서의 예술의 역할과 의미가 점점 강조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본질을 추구하는 예술의 역할은 무겁고 어둡고 어렵고 낯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린 시간과 다른 방향의 공간을 가진 작업들이 가진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작가의 설치 작업들은 오래고 깊은 비주체들의 정동적 조각이다. 지역성과 역사성을 설명하거나 설득하지 않아도 사물의 드러내는 특유한 감수성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고, 사물 자체의 실질적 표현으로 알 수 있다. 또한, 시간을 머금고 있는 ‘시간의 표현’으로서 실재적이다. 지역성과 장소성을 강조하는 공간 중심적 관점에서 시간성이라는 다른 축으로 넘어가는 존재론적 전회이다.
인간은 자라고 살아온 공간의 장소성에 깊이 관계하며 개인의 세계관과 감수성을 구성한다. 그러나 예술가로서 지역의 장소성을 예민하고 섬세하게 재구성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가 지역 예술 혹은 지역 작가라고 하는 말엔 물리적 공간으로서 지역 그리고 작업과 활동의 소재나 대상으로서의 장소성과 역사성으로 한정 하곤 한다. 작가 정현의 작업에서 인간 중심의 지역성, 장소성, 역사성과 긴밀하게 관계하기 보단, 수평적이고 관계적인 다종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비주체가 담고 있는 복잡하고 섬세한 시간성으로 소중한 본질을 찾아가고 인간과 자본 중심의 세계에 대한 성찰과 반성으로 재구성하는 다른 지역성으로서 로컬리티를 발견한다.
채은영은 통계학, 예술경영, 미술이론을 공부했다. 도시 공간에서 자본과 제도와 건강한 긴장관계를 갖는 시각예술의 상상과 실천과 관심이 많은 리서치 기반 기획을 한다. 2016년부터 시각예술과 로컬리티, 생태 정치 관련 활동을 하는 임시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인간과 우리들의 힘 강수정 ·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오늘도 전시장의 입구에 한 사람이 조각대 위에서 어깨를 깊숙이 머리를 파묻고 맨 등을 보이며 조각대에 올라 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조명은 선명하고, 등에는 삶의 파편처럼 빛과 뒤엉킨 그림자가 울퉁불퉁 새겨져 있다. 그의 등은 아우성도 없고, 변명도 없다. 모든 것이 명백하고 극적이며, 많은 것들이 실제보다 더 있어 보여야만 제대로 평가받는 이 시대에 도대체 이 ‘맨 등’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무제>(도판1)는 조각 재료에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 그 속에 온화한 생명력을 불어 넣는 작가 정현이 석고와 마닐라 삼을 이용하여 인체를 표현하고, 이를 통해 인간의 본성을 탐구한 작품이다. 그는 지금도 아스팔트 콘크리트, 철로용 침목 등 현대적인 재료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개개인의 존재와 또 이들 사이의 존재감이 지닌 힘의 본질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표현하고 있다. 특히 석탄과 침목을 재료로 한 작품들은 그의 작품세계를 잘 나타내 준다. <무제>(도판2)의 석탄 덩어리는 작가의 손길이 스친 듯, 스치지 않은 듯, 덩어리 속에 갇힌 간결한 제 본래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이미지와 감정 과잉의 시대에 이 덩어리는 아무런 설명 없이도 ‘마땅히 있음’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로서 우리는 석탄 덩어리의 존재감이 주는 묵직한 힘을 느끼게 된다. 또한 우리는 실제 철도에서 쓰여 진 15개의 침목을 주재료 한 <무제>(도판3)에서도 같은 힘을 느낄 수 있다. 무겁고 낡은 침목들이 서로를 엮어 만들어 낸 둥근 공간을 점하며 묵묵히 서 있다. 이 침목들은 기차의 격렬한 속도와 무게를 돌멩이가 깔린 불편한 밑바닥에 누워 견뎌낸 것들이다. 이들은 아주 긴 시간 동안 무궁화에서 KTX로 변환되는 시간과 사람들의 이동을 지켜보며, 묵묵히 그 흐름을 자신의 몸속으로 받아 안고 존재한 것들이다. 이는 작가의 손을 통해 물질로 특성화되어 15개의 침목은 침목이되 침목이 아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거듭나게 되었다. 정현은 이처럼 과장된 표현보다는, 찍거나 파낸 행위 등을 통해 침목이 지닌 본성을 드러냄으로써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 스쳐지나가는 것을 ‘아무것이 되도록’ 하는 미덕을 선물해 준다. 이는 그가 이 물질들의 특성을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하기 위해 조각도가 언제, 어느 곳에서 멈춰야 할 때와 곳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를 비워내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침목은 작가 정현과도 매우 닮은 재료이다. 격렬한 열정보다는 온화한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를 바라보면, 아마도 그만큼 곰 삭이는 아픔도 많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만이 가지고 있는 온화한 열정은 오늘도 물질을 가장 물질다움으로 구체화시켜 이것이 곧 사람들의 이야기로, 우리들의 힘으로 표출되기를 희망한다. 그는 우리에게 ‘맨 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올해의 작가 2006 정현>전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2006년 10월 13일 -12월 17일까지 개최됩니다.
환원과 일탈의 미학 - 정현의 작품에 대하여 오광수 · 미술평론가
정현은 파리에서 돌아오면서부터 왕성한 작업을 펼쳐보였다. 이토록 치열한 작업의 진행을 주도해가는 경우는 결코 흔치 않는 일이다. 92년 원화랑에서의 개인전을 시작으로 97년 원화랑, 98년 프랑스 문화원의 개인전이 이어지다가 2001년 금호미술관, 2004년 김종영 미술관, 2006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잇따른 미술관 개인전은 어떤 정점을 장식해주고 있는 인상이다. 최근 8년 사이 세 개의 주요 미술관에서 초대전을 가졌다는 것은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로 이는 정현의 작업이 갖는 분출하는 에너지와 주도한 창작의 집념이 어떤 공감을 이루면서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본다. 이는 결코 우연한 행운은 아니다.
파리에서의 귀국 후의 그의 작업은 석고로부터 시작된다. 흙으로 만든 덩어리를 각목이나 삽과 같은 기구로 내려쳐 볼륨과 날카로운 단면을 만들어 이를 주물로 떠내었다. 이들 작품은 비교적 조각 본래의 양괴에 충실한 것일 뿐 아니라 소재가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조각의 문맥에 밀착된 것이었다. 흙덩어리를 주물고 각목이나 삽으로 일정 부분 강한 물리적 반응을 가하여 일그러진 인간의 형상을 묘출해준 것들은 때로는 고뇌하는 인간상으로, 때로는 묵상하는 인간상으로 나타났다. 설명적인 부위와 날카롭게 깎아 내린 단면을 대비시킨 이들 인간상은 기념비적인 내연을 지닌 것으로 로댕의 발자크상이나 부르델의 배토벤 상을 연상케 하였다.
그가 에콜 데 보자르 시절 추구해보였던 형해화 된 인간상에 비하면 풍부한 볼륨을 지닌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거의 미이라에 가까운 깡마른 뼈대만이 앙상하게 남아난 보자르 시절의 작품이 갖는 선적인 것에 비하면 양괴적인 요소가 되살아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그의 작업은 일정한 시기를 두고 환원과 일탈이 주기 화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선적인 작업에 이어 양괴적인 작업이 나타나다가 다시 선적인 작업이 등장하고 이어 양괴로 다시 환원하는 것으로서 말이다. 때로는 이들 선적인 요소와 양괴적인 요소가 하나의 작품 속으로 융화하는 경우도 나타난다. 이를테면 침목에 의한 군상 계열이 이에 속한다.
그가 2006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초대전에 집중적으로 선보인 침목에 의한 작품은 그의 조각하는 태도 또는 조각에 대한 독자한 인식을 가장 극명히 보여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시장과 전시장 사이를 연결하는 긴 공간에 진열된 침목에 의한 인간상은 마치 진시황의 토용을 방불케 한 것이었다. 땅 속에 파묻혀 오랜 세월 지하에 있던 흙으로 만든 병사들이 밖으로 들어났을 때의 그 장대한 스케일과 엄청난 땅의 열기가 능히 몇 천 년을 견디어온 역사의 도저한 무게를 감당한 것이었는데 정현의 침목에 의한 인간상은 그러한 역사적 유물과 비교되면서 인간과 산업사회, 인간과 근대문명의 치열한 대결과 화해의 기념비적 형상으로 인상된 것이었다.
정현이 침목에 관심을 기우린 것은 꽤 오래 되었다. 그의 말처럼 침목을 발견하고 바로 그것을 재료로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방치된 상태로 놓아두고 보는 것이다. 그는 이를 재료와의 만남이 단순한 사용자와 대상으로서의 관계에서 벗어나 서로에게 순치되는 일정한 시간을 경과한 후(그는 약 10년 간 놓고 보았다고 한다)에 작업에 임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발견이 곧 창작이 될 수 있는 내역을 말해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마르셀 뒤샹은 발견하는 것도 창작이라고 하였는데 정현이 침목을 발견한 순간 이미 창작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어느 날인가 버려진 침목을 본 순간 레일 아래에서 육중한 무게와 비바람을 묵묵히 견뎌온 인고의 세월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마치 침목이 한 인간이란 역사처럼 다가온 것이다.” 그의 말은 침목을 단순한 재료, 물질로서 본 것이 아니라 인고의 세월을 한 몸에 지닌 인간의 역사로 보았다는 것이다. 침목의 군상이 그토록 강열하게 어필해오는 것은 침목이 버려진 재료의 사용이란 점에서도, 조각으로 다루기에는 적절한 재질이 아님에도 이를 극복해주었다는 점에서도 아니다. 그것이 인간의 인고의 역사로 다가왔기 때문에 감동을 준 것이었다.
정현이 선택하고 있는 재료는 대부분 버려진 , 용도가 폐기된 질료들이다. 현대 사회에서 버려진 질료란 상당 부분 산업 쓰레기일 것이 분명하다. 침목이 그렇고 아스콘이 그렇고 막돌이 그렇고 철근이 그렇다. 그것들은 어떤 용도에 사용되었다가 용도가 다한 것이다. 버려졌다는 것은 용도가 폐기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버려진 질료들이 정현에 의해 발견되고 그의 손을 거쳐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의 작업장에는 이렇게 버려진 산업 쓰레기들이 새로운 삶의 탄생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
정현만큼 재료에 대한 인식이 남다른 조각가도 많지 않다는 것은 그의 전체적인 작업의 맥락을 통해 볼 때 새로운 재료의 만남과 대결 또는 순치의 과정으로 엮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질과의 부딛침은 물질과의 만남의 관계를 설정하기 위함인데 때로 격렬한 대응의 형식을 띠는 경우는 물질의 내면에 잠자는 본성을 일깨우기 위한 조치이다. “침목 작업에 들어가기 오래 전부터 침목 그 자체의 엄청난 에너지에 주목해 왔었다”는 말은 침목 속에 잠겨있는 에너지란 본성을 어떻게 끄집어 낼 까의 접근이기도 하다. 침목은 길게 이어지는 레일을 받쳐주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작가가 침목 속에 엄청난 에너지를 감지했다는 것은 침목이 지닌 역사성에서다. 단순히 레일을 떠받치고 있는 물질이란 사실 외에 오랜 시간을 두고 지탱해왔다는 시간의 두께가 겹쳐진 것이기도 하다. 용도가 폐기된 침목은 레일을 받쳐주는 기능이 폐기되었을 뿐 그것이 지닌 인고의 시간의 두께는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역사의 무게에 다름 아니다. 다른 폐기물에서도 이 역사의 무게를 발견하게 된다. 그가 선택한 재료가 지닌 이 특별한 내재율이야말로 다른 조각가들에서 엿볼 수 없는 것이다.
그가 선택하고 있는 재료는 조각 일반의 재료의 범주에서 벗어난 것이 대부분이다. 청동에 의한 작품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재료가 생경한 것들이다. 과연 이런 재료로 작품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일어날 때도 있다. 창작에 앞서 발견이 그에겐 더욱 의미 있는 과정이 되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 “살아 있음 그 자체, 날 것, 예측을 불허하는 이미지”가 그의 작품 전체를 관류하는 요체가 아닌가 생각된다. 생생한 세월의 무게를 그대로 나타내려는 의도나 다듬지 않고 수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날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의 대담한 제시는 지금까지 조각이 시도해온 변형시키고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일체의 방법적 논리에 반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일탈의 조각이 갖는 의도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김종영 미술관에서의 개인전은 주로 아스콘에 의한 작품이 중심을 이루었다. 침목이 철로 밑에 깔려있었던 질료라면 아스콘은 길바닥에 누어있었던 것이다. 침목에 못지않게 아스콘 역시 엄청난 시간의 무게, 역사의 겨를 지닌 물질이 분명하다. 침목이 조각의 재료로 발견되는 것보다 아스콘이 조각의 재료가 되는 것은 더욱 예상되지 않는 일이다. 아스팔트 콘크리트 덩어리인 아스콘이 조각의 재료로 선택되었다는 자체만으로도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도 그는 날것에서 오는 생명력, 거칠고 팽팽한 표면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생명의 에너지를 발견했음이 분명하다. 아스콘이 선택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막돌이나 석탄 덩어리를 그대로 조각으로 가져올 수 있었던 대담한 선택의 문맥에 이어져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래 위에 설치된 아스콘 덩어리는 공중에서 내려다 본 산맥의 한 단면 같기도 하고 땅에 누인 인간의 모습으로도 유추되었다. 땅 속에 파묻혀 있던 오랜 무덤 속의 미이라처럼 응고된 형상을 띤 것이었다. 다른 어떤 질료보다 생생한, 있는 그대로의 날 것을 보여준 것이었다고 할까.
조각가로서 정현은 조각에 못지않게 많은 드로잉을 남기고 있다. 드로잉은 그에게 있어 조각과 따로 떼어내 생각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조각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고 동시에 드로잉의 연장선상에서 조각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드로잉은 종이에 연필로 하는 것도 있고 골타르와 같은 끈적끈적한 질료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 드로잉은 대체로 인간상 또는 인간의 신체 부위에 집중되었다. 일회적이기 때문에 드로잉은 다분히 직설적인 성향을 띨 수밖에 없다. 최근의 드로잉은 질료자체가 형태를 대변하듯 날카로운 필선 자체가 존재감으로 현전하는 것들이다. “가을을 지나 누렇게 누워있는 풀들을 철판에 드로잉했다. 착색된 철판을 철근, 톱으로 긁어내거나 자동차 뒤에다 철판을 메어서 자갈밭을 끌고 다니면 거기서 얻어지는 자연스럽고 우연한 흠집들이 산화되어 녹으로 바뀐 이미지 작업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드로잉은 날카로운 필의 획, 형태보다 달리는 필의 획이 먼저 나타난다. 그린다는 행위에 앞서 그려지고 그린다는 행위보다 먼저 마무리된다. 물질에 강하게 부딛침으로 들어나는 필의 획이 갖는 날카로움이 날카로움 그 자체로 현전한다. 어쩌면 이는 그의 조각에서 들어나는 형태를 앞 질어 질료 자체가 들어나는 경우와 일치한다.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양괴적인 것과 선적인 것의 부단한 반복 현상처럼 수평적인 것과 대비적으로 수직적인 것의 반복현상도 지적할 수 있다. 아스콘에 의한 수평적인 형상에 비해 그가 최근 시도하고 있는 버려진 철근에 의한 수직적인 형태는 전반적으로 수직적 의지의 상승을 시사해주고 있다. 이미 수직적 형상은 현대미술관의 개인전 때 분명히 들어났다. 미술관 입구에 설치된 기둥들은 그의 미래의 작품이 지닌 의도를 흥미롭게 시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작품은 폐기된 철근에 의한 수직의 의지를 표상한 것이다. 이 솟아오르는 형상은 최소한의 형태로서의 조각의 범주를 벗어난 것으로 가까스로 존재한다고나 할까. 조각이기도 하고 조각이 아니기도 한 경계 선상에 가까스로 존재하는 것, 형태이기도 하고 형태가 아니기도 한 간극 속에 가까스로 존재하는 것 , 그것이 발산하는 팽팽한 긴장감이 온통 전 공간을 거대한 탄력으로 끌어당기고 있다.
조각의 해방 혹은 탈주로 - 정현, 조각으로 철학하기 김종길 · 미술평론가
‘만들기’에서 ‘배치하기’로
정현의 조각은 일견 전통적인 조각개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처럼 인식된다. 그래서 그의 조각분석을 위한 이론은 자칫 지나치게 실존(주의)에 기대거나 조형적 형상론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이 실존과 무관하거나 형상성이 취약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너무 강해서 탈이라면 탈일까. 그래서 이론가는 해석의 편차를 넓히지 못하고 쉽게 그것에 매료되거나 자주 혼란에 직면한다.
정현의 조각을 입체적이면서도 사려 깊게 살피기 위해서는 ‘조각가 정현’과 ‘(정현) 조각의 개념’, 그리고 ‘(그의) 작품’을 분리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해석의 트라이앵글인 [조각가-조각개념-작품] 이 셋의 구도는 명확히 구별되기도 하고, 이론가에 따라서는 굳이 구별하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보통은 유기적으로 묶는 게 상식이다. 이 세 개의 개념적 주체들을 연결하는 것으로 이론가는 해석의 편리성을 획득하고 또한, 개념적 키워드를 추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셋을 유기적으로 묶을 수 없는 것이라고 전제하면 어떻게 될까? 요컨대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정현’은 조각가 정체성과 무관한 행보를 더 많이 할 것이다. 그는 오직 조각만을 위해 살아가거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가 작업실에 들어가 조각가로 돌변하는 순간 비로소 그의 조각가로서의 정체성과 조각개념은 발생할 터. 조각가 정현이 사회적 주체이면서 동시에 예술적 주체라면 그의 조각개념은 사회와 예술의 제도적 개념이되(‘조각’은 이미 사전적 개념으로 정의되니까), 동시에 그 개념으로부터 일탈하려는 ‘생성-의지’로서의 개념이고(‘탈-조각’을 지향하니까), 작품은 그런 주체와 ‘생성-의지’가 발현해 놓은 신생어(新生語)일 것이다. 우리는 그 일련의 과정을 ‘조각하기’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의 ‘조각하기’는 결과적으로 어떤 물적 토대위에서 시작되고 하나의 ‘물성’으로 발현되고 있지만, 그의 ‘조각하기’가 반드시 물성을 갖춘 ‘조각품’ 제작에 목적성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트라이앵글의 개념을 유기적으로만 해석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나는 그의 ‘조각하기’에서 몇 가지 특이점을 발견했는데, 그는 인간의 신체에서 조각형상의 뿌리를 길어 올렸으나 마닐라 삼으로 엮은 석고, 철로용 침목, 아스팔트용 아스콘, 그리고 건축용 철근으로 이어지는 재질의 변화와 이에 따른 ‘조형적 변이變異’를 통해 기존의 조각개념을 해방시키려 들뿐만 아니라 신체에 갇힌 ‘인간의 비극적 실존’을 탈주하도록 이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붙이고 두들겨 깎은 하나의 덩어리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부분들을 결합시켜 놓은 ‘배치’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의 조각은 만든 것들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 결과를 다시 흩뜨려 배치함으로써 완성된다. 다시 말해 그의 작품들은 유기적 전체를 위해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며 변용능력을 갖춘 부분들에 의해 ‘배치되는 것’이다.
그의 ‘조각하기’는 묶거나 다져진 흙․석고․청동으로 된 형상으로서의 어떤 덩이를 배치하기, 침목을 흩뜨려 배치하기, 아스콘을 흩뜨려 배치하기, 철근을 흩뜨려 배치하기로 풀어질 수 있다. 그는 이 ‘배치하기’를 위해 부분을 전체화하는 조각적 노동을 수행한다. 초기, 석고 작품을 위해 마닐라 삼으로 ‘묶는 행위’나 침목, 아스콘, 철근을 절단하고 붙이기 위해 사용한 전기톱과 용접봉은 그러므로 신체의 유기적 결합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분으로서의 기관들을 ‘독립시키기’ 위해 작동되었다. 그의 작품에서 신체와 부분적인 기관들은 하나일 수 없다. 부분은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그 자체로 전체이니까.
‘배치하기’와 ‘흩어지다’의 의미
그의 ‘배치하기’는 청나라 초기의 화가이자 이론가 석도石濤 주도제朱道濟가 지은 <고과화상화어록(苦瓜和尙畵語錄)>의 일획론一劃論 첫머리 “태고무법太古無法, 태박불산太朴不散, 태박일산太朴一散, 이법립의而法立矣.”에서 ‘산散’과 의미가 상통한다. 풀면, “아득한 옛날엔 법이 없었고, 큰 통나무도 쪼개지지(흩어지지) 않았다. 통나무가 한 번 흩어지니 비로소 법이 섰다.”인데, 여기서 ‘흩어지다’의 뜻은 인간의 유위적 행위를 가리킨다. 통나무가 순수 가능태로서의 기질이라면, 흩어진다는 것은 인간이 거기에 어떤 예술적 행위를 가한 것, 즉 유위행위인 것이다. 다시 말해 통나무가 흩어져야만(쪼개져야만) 조각이 생겨나고, 그런 ‘배치하기’와 ‘흩어지다’에 의해 미학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석고를 흩어지게 하고 침목을 흩뜨리는 것, 도로에 깔았던 아스콘을 흩뜨리고 철근을 흩어지게 하는 것 그 모두가 ‘배치하기’와 다르지 않지 않은가.
프랑스의 시인이자 연극연출가였던 앙토냉 아르토는 “신체는 신체다. 신체는 혼자이다. 또한 기관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체는 결코 유기체가 아니다. 유기체는 신체의 적이다.”라고 말했다. 질 들뢰즈의 그 유명한 ‘기관 없는 신체’는 아르토의 발언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첫 샘물은 바뤼흐 스피노자였지만. 들뢰즈는 “기관들도 전체를 형성하지만, 이 전체는 부분들을 통일하지도 전체화하지도 않으며, 부분들 곁에 있는 전체로서 산출된다.”고 했다. 아르토의 ‘신체’가 배우의 몸에서 파생된 개념이라면, 들뢰즈나 스피노자의 ‘신체’는 사회와 관계 맺는 인간의 몸 그 자체이다.
정현의 조각은 전자일까(조각적 대상으로서의 ‘몸’) 후자일까(사회적 인간으로서의 ‘몸’). 그의 작품의 시작이 1980년대 한국사회의 현실에 등기대고 있단 점에서 후자에 가깝지만, 거의 모든 작품들이 표현적 리얼리즘의 고갱이를 ‘시학적詩學的 조각’으로 응결한 것이란 점에선 전자를 포용한다. 배우는 몸의 기관들을 유기체에서 의도적으로 분리시키는 훈련을 통해 ‘대사’라는 말의 언어를 몸 전체로 확장한다. 손으로 혹은 발끝으로 말하고, 등으로도 말하며 머리끝으로 말하지 않던가. 스피노자를 빌리면 배우의 몸은 “능동적인 변용의 능력을 통한 부분들의 결합체”인데, 정현의 조각이 그렇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신체를 마치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려는 듯 엮어서 연결해 놓았지만, 실제로는 ‘자기보존과 생성의 욕망’을 가진 부분들을 ‘신체형상’으로 배치한 것에 불과하다. 자, 한 번, 다시 읽어보자.
“기관들도 전체를 형성하지만, 이 전체는 부분들을 통일하지도 전체화하지도 않으며, 부분들 곁에 있는 전체로서 산출된다.”
‘부분들의 곁에 있는 전체’라는 말이 솔깃하지 않은가!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논고』(1665)에서 “민중은 왜 자신의 예속을 영예로 여기는가?”를 물었고,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그런 물음에 빗대어 “대중은 왜 억압을 욕망하는가?”를 따진바 있다. 사회든 국가든 계급이든 권력으로서의 전체는 부분을 예속화하려 한다. 뿐만 아니라 부분도 전체의 부분으로서만 자유를 획득하려는 든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히 오류다. 68혁명에서 개별적 주체들은 이러한 전체와 부분의 ‘전체주의적 권력구조’를 수정하고자 했다. 들뢰즈가 68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이유이다. 마찬가지로 1980년대 한국사회의 변혁적 현실에서 정현도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졌다. 정현의 조각적 사유를 작품에서 연역적으로 찾는다면 그것은 들뢰즈가 따졌던 ‘욕망’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억압을 욕망하는’ 주체들. 그러나 그는 그 주체들의 전체보다는 부분에 주목함으로써 억압을 해체시킬 수 있었다.
정현은 조각의 부분들을 전체에 예속시키지 않았다. 전체는 부분들의 곁에 있는 것으로 족하니까. 아니 전체는 부분을 위해서만 존립할 수 있다. 그의 작품들을 보면(특히 아스콘으로 제작한 작품들) 전체라는 ‘유기적 덩어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각각의 개별적 부분들을 ‘형성시켜’ 잇거나 덧대고 조립하며 그저 배치할 뿐이다.
억압된 신체의 탈주
초기 작품들은 석고와 마닐라 삼으로 엮은 신체를 통해 ‘억압을 욕망하는’ 인간을 조형화 했다. 기관 없는 신체로서 이 조각들은 스피노자가 ‘예속을 위해 투쟁하는 민중’이라고 지적했던 기묘한 자유의지를 엿보인다. 조각의 각 부분들이 전체와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적극적인 해방의 출구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신체들은 ‘육체’와 구분되지 않을 만큼 육질적이다. 어쩌면 그의 신체는 신체에 의해서만 신체를 획득할 수 있는 자기모순에 빠져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인간의 형상을 구체적으로 갖춘 신체만이 신체로서의 형상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그런 믿음으로서의 모순.
그러나 침목과 아스콘으로 이어지는 행보는 억압을 해방시키려는 그의 의지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육중한 침목을 도끼와 전기톱으로 흩뜨린 뒤 다양한 형상으로 재배치 한 점이나 또는 도로공사를 위해 뜯어낸 아스팔트 아스콘을 도려내고 썰어서 마치 몇 개의 섬처럼, 산처럼 배치했으니. 설령 그것의 전체 형상이 인간의 신체를 유추해 낼 수 있다손 치더라도 석고를 엮거나 두들겨서 만든 작품과는 다르다. 그것은 하나의 분출이고 폭발이며, 해방이고 탈주이기 때문이다.
철근 작품들에 이르면 그의 신체가 ‘인간의 신체’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보여준다. 이제 그의 신체는 모든 것들의 신체로 열려진 셈이다. 모든 부분들이 모든 존재들이고 그 존재들 사이에 전체가 흐르고 있다. 신체는 하나의 다리, 팔, 머리처럼 하나의 가지, 하나의 꽃, 하나의 대나무, 하나의 돌이 된다. 이러한 사유는 동아시아의 오래된 철학이기도 한데, 17세기 조선의 학자 강백년은 “도로써 천지를 보고 천지로써 만물을 본다면, 나我 또한 물物이요, 물은 또한 나이다. 천지는 또한 만물이요, 만물은 또한 천지이다. 어떤 물이 나가 아니겠으며, 어떤 나가 물이 아니겠는가. 그런즉 내 몸이 하나의 태극太極일 뿐 아니라, 만물 또한 하나의 태극이며, 물물物物이 저마다 하나의 태극을 지니고 있다. 천지 또한 하나의 태극인 것이다.”라고 했다. 인간과 만물이 일체이며 저마다 하나의 주체라는 얘기다. 그는 인간 혹은 사유하는 ‘나’만이 주체가 아니라, 모든 생명, 모든 존재가 주체일 수 있다는 평등안을 견지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현의 조각적 사유가 넓어지는 지점에 그런 미학적 배경이 있는 게 아닐까.
정현의 조각은 조각으로서가 아니라 조각의 해방을 위해 읽을 때 더 깊어진다. 그의 조각은 신체를 더 넓은 곳으로 탈주시킴으로써 자유를 얻는다. 그리고 그렇게 해방과 탈주의 드넓은 초원에서 그는 비로소 조각이 아닌 조각, 정의될 수 없는 조각, 하나의 물음이며 의문이 되는 조각을 상상하고 있다. 바로 그 지점에서 그와 조각, 작품의 매개 고리가 끊기면서 또한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생명, 시간과 능력 량커강(梁克剛) · 北京壹美術館 館長
鄭鉉을 알게 된 것은 금년 2월 초, 베이징 진르 미술관(今日美術館)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에 참관했을 때였고, 이 때 나의 知友이자 한국의 전시회에 참가했던 궈옌(郭燕) 씨로부터 소개 받았다. 정 선생에게서 마치 고대 문인 高士와 같은 유학자적인 풍취를 느낄 정도로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다. 또한 매우 겸허하고 무난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가 명문 미술대학교 교수 출신에 일찍이 수년간 프랑스를 유학한 한국 최고의 예술가로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서로 알게 되면서 그가 예술에 대해 자신의 독특한 판단과 깊이 있는 사고를 지니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진르 미술관에서 그다지 크지 않은 개인전을 열었지만 그의 작품 하나하나가 모두 뛰어났고, 전시 기간이 매우 짧아 많은 관객들이 관람하지는 못했지만, 오히려 베이징 화단에 매우 점층적인 자극을 주어 많은 반향을 만들어 내었다. 작품의 표현에서 보면, 대체로 전통에 대한 풍자 내지 현실의 조롱, 혹은 복잡한 문화적 기호를 과장하여 중국 컨템포라리 아트와 매우 비교될 정도로 눈을 빼앗기게 된다. 정 선생의 작품은 겉으로는 호방한 기운과 간략함, 소박한 내재성도 지니고 있지만, 오래 시간 두텁게 쌓인 내적 힘과 그 능력의 크기까지 내포하고 있다.
수년간 유럽을 경험했던 정현은 서구 유럽 조각의 기원인 고대 그리스 로마의 뛰어난 전통을 수용하면서, 그러한 고도의 정신과 개념화한 청동 및 석고(Plaster), 마닐라 헴프(Manila Hemp) 등을 결합한 조각 작품을 창작하여 상당히 다른 조형 세계를 개괄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 두드린 흔적은 조금도 인위적이지 않은 채 자연스러움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는 아마도 그가 짊어진 운명에 따라 “無題”라는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데, 즉 고대 로마의 통솔자, 고뇌에 찬 그리스 철학자, 두려움 없는 戰士, 그리고 숙명에 저항하는 노예 등에서 느낄 수 있는 위용과 엄숙함을 준다. 이는 마치 긴 하나의 歷史時 중의 단편과도 같아, 어떤 두려운 인간의 혼백과도 같은 비극적인 아름다움을 계승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기법에서 동아시아 전통문화의 토양에서 뿌리 깊게 자란 독특한 예술 관념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 때 세련된 간략함은 금과 같이 아껴 쓴 刀法의 경지에 이르고 있고, 또 동아시아 전통인 水墨寫意畵와 같은 “내는 소리는 크나 들리는 소리는 작고, 큰 형상을 이루나 형태는 없다 ”는 意境의 세계와도 통하는 경지를 추구하고 있다.
그는 늘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생각되는 폐기를 재료로 사용하는데, 즉 오래 전에 폐기된 철재, 철도침목, 석탄, 콜타르(Coal Tar) 등과 같은 재료를 마치 간단히 두드려 조합한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재료는 생명을 부여받아 뛰어난 작품으로 창조되었다. 이는 결국 경시되고 무시된 폐물, 폐기 재료가 정현의 손에서 예술생명으로 살아나 세상에 알려지게 되니, 마치 “작은 돌조각이 금이 되는”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정현에게 있어서 최근 2년간의 창작 이념은 매우 크게 진척되어 넓혀졌는데, 대자연과 시간이 마치 “하나로 계획한(同謀)”듯 한 창작 세계를 보여준다. 그는 이렇게 붓으로 칠해봤자 소용없는 철판의 표면 위를 刻하고, 또 다른 방식으로 긁고 간 흔적의 철판을 다시 밖에 두고 바람과 비를 맞혀가며 자연히 부식시킨다. 이와 같이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 부식의 흔적을 작품의 生長 역정 속에 기록하고 있다. 이는 마치 종결지을 수 없는 생명을 열어 놓은 것 같고, 대자연과 시간의 계획된 조합 아래 소리 없이 동아시아의 독특한 “天人合一”의 정신적 세계를 전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과 같다.
나는 한국의 어떤 아트페어에 참가하게 되어 몇 달 전 서울에서 다시 정현 선생을 만날 기회를 갖게 되었고, 이 때 정 선생은 뜨겁게 나를 맞아 주었다. 이런 기회에 우리 일행은 처음으로 가장 훌륭한 한국의 미술, 디자인, 미식과 같은 여행을 진지하고 알차게 경험했는데, 정 선생의 세심한 배려로 미술관을 참관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아한 음악까지 제공받게 되자, 새삼 정 선생이 수준 높은 문화 소양을 지닌 우수한 예술가임을 느끼게 되었다. 사람의 기질 역시 그의 작품에 반영되는데, 비록 소박한 재료를 사용한 그의 작품은 세련된 기법과 형식의 균형감으로 인간의 세밀한 감정을 움직이는 능력을 깊이 감추고 있는 셈이다. 나는 오늘날 아시아 지역에서 이러한 예술가가 존재한다는 것에 마음속으로부터 성심껏 기쁘게 위로받고 있다.
2009. 4. 30
정현 선생의 창작세계 인지난(尹吉南) · 北京 中央美術學院 人文學院 院長
정현 선생은 한국의 컨템포라리 예술계에서 매우 중요한 미술가 중의 한사람이다. 이번에 처음으로 중국에서 개최하는 그의 개인전에서 선보일 대표작들은(거대한 무게의 작품들을 포함하여) 중국 관람객들에게 정현의 사유세계를 한번 여행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정현 선생은 대다수 한국미술가와 같이 다문화적인 교육적 배경을 지니고 있는데, 즉 서양 현대문화를 흡수한 동시에 한국 전통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서로 다른 이 두 세계의 충돌 과정 속에서 정신적인 사유와 창작을 끊임없이 해왔다. 그의 정신적인 사상의 자원은 넓힐 수 있는 한 더욱 오래된 고대에까지 연결되어있다.
그가 산업과 자연에서 나온 폐기물을 이용하여 창작을 해온 것은 이미 서구에서 존재한 '기성품(레디 메이드)'의 개념이기도 하며, 또 동양의 '物極必反(최고조에 이르면 그 반대로 전환하는 이치)' 사상이기도 하다. 그가 사용하고 있는 이러한 재료는 언어적인 실험 혹은 일반적인 '환경보호'라는 의미를 넘어서서, 이들의 유효한 지역을 두 세계로 이분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즉 실리적인 목적으로 '완전한 세계'를 만들어 내고 또 이러한 '완전한 세계'로 인해 남겨진 '미흡한 세계'를 만들고 있다. '미흡한 세계'를 통해 전달된 새로운 의의는 일종의 '특별한 방법(돌파구)'로 드러나게 된다.
본인의 개인적인 생각에서 말하면, 그의 최근 작품들은 고도의 정신세계에 도달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관심이 간다. 작품에서 인공적인 재료는 작가의 의도에 따라 구상된 것으로 최후의 자연의 힘을 빌려와 완성하고 있다. 이는 마치 철판 위에 아름다운 녹슨 흔적을 수놓고 있는 것과도 같다. 여기서 하나의 흥미로운 '天人관계'가 표출되고 있고, 이는 대자연과 인간이 공동으로 합작한 '미흡한 세계'로서, 방법론으로는 마치 고대의 儒家 사상을 사용하고 있는 것 같은 반면에 그 뼈대를 이루는 정신은 바로 오늘날의 禪宗의 세계와도 같다고 할 수 있다.
2009년 1월 9일 북경에서
소진된 물질들의 에코그래피 강수미 · 미학, 동덕여대 교수
16t의 무쇠로 무지막지하게 만든 검은공과 1g이 채 안 되는 콜타르 용액은 어디서 만나는가? 몸체 전체가 쩍쩍 갈라져 그 틈새마다 검은 기름때로 눅진한 낡은 침목(枕木)과 바늘 한 점 꽂을 데 없이 단단한 흑색 석탄덩어리는 또 어디서 접점을 갖는가? 그것들 모두가 여타 소소한 사물들보다 자체의 강력한 물질적 속성을 외관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아니면 그것을 마주한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그로부터 제각각 다르지만 지각의 강도 면에서는 강렬하고 자극적인 질량, 밀도, 부피, 색채, 형태를 보게 된다는 점에서? 관점에 따라 다양한 관계를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 정현의 경우에 한정하면 그것들은 조각의 지평에서 만난다. 그리고 그 넘치는 강렬함과 표현성을 내장한 물질들은 정현의 창작세계에서 ‘인간’이라는 근원적이고 현실적인 예술 주제(기의)를 가시화하는 모티프(기표)로써 접점을 형성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조각에서 인간의 몸을 보려 하지 않는다. 그의 드로잉에서 인간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는 쪽 또한 나이다. 여기 감상자로서 나는 그의 작품들이 내뿜는 막대한 물질적 존재감, 언어를 희박하게 만드는 시각적 표현력, 관객과의 즉물적(literal) 조우를 유도하는 설치의 힘을 인간적인 의미나 맥락으로 약화시키고 싶지 않다. 이를테면 국내 굴지의 철강회사에서 만들어 사용한 일명 ‘파쇄공’이 10여 년 간 25m 높이에서 수직 낙하돼 쇠의 불순물을 정제하는 동안 16t에서 8t으로 소진된 과정을 인간 시련의 역사와 유비시키고 싶지 않은 것이다. 또 수십 년간 기차 하중을 고스란히 온몸으로 견뎌온 선로의 버팀목을 삶의 무게에 짓눌릴 수밖에 없는 인간 운명에 대한 존재론적 비유로 해석하거나, 검붉게 녹슨 철근들이 얽히고설킨 형상을 인생의 신산(辛酸)한 속성과 유비시켜 논하기를 원치 않는다. 통상 그런 해석이나 논리는 여차하면 센티멘털리즘으로 변질돼 사람들에게 상투적 위로만 남기기 때문에.
그런데 이런 나의 비평 방향과는 상관없이, 혹은 그런 차원에 앞서서 작가는 애초부터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작품을 했을 수 있다. 다르게는, 인간과 인간형상의 면대면 관계 및 교감에 자기 작업의 가치를 설정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작가는 오래전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이 시대의 실존상, 뻥 뚫리고 찢겨지고 일그러진 절박한 인간의 순간순간에 보다 가까이 다가서려고 한다.” 1992년 《월간미술》에 기고한 작가의 글에서 발췌한 이 문장은 조각가 정현이 둔중한 진흙덩이를 각목으로 퍽퍽 쳐내고, 딱딱한 석탄덩이를 끌로 깍깍 파 들어가고, 찐득한 콜타르를 종이 위에 쫙쫙 그어나가는 촉각적 표현법으로 무엇을 가시화하고, 어디에 도달하고자 했는지를 말해주는 것 같다. 그것은 문맥상 여지가 없듯, 인간의 실존적 고통을 시각적으로 수사(修辭)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휴머니즘적 미술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니 질척거리는 감상주의가 두려워 그의 미술에서 인간을 피하려 한 나는 틀렸다.
물질과 인간의 정밀 조영(照影/造營)
그런데 정현의 조각이 인간을 은유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좋다고 느낀 것일까? 그의 작품들이 감상자의 휴머니즘적 정서를 어루만지므로 감동적인 것인가? 둘 다 맞다 해도, 그것으로 충분한가? 이제까지 작가 자신은 물론 여러 논자들이 그의 작업에서 거의 예외 없이 인간을 향한 가치를 발견했거나, 반대로 인간적 가치를 통해 그의 미적 세계를 정의했다. 하지만 결코 감추거나 위축시킬 수 없는 정현 조각의 어떤 면모는 그 같은 순환논법과 순치된 인문주의로는 밝혀낼 수 없어 보인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유는 사물/대상의 존재(objecthood) 자체, 행위(performance) 자체, 사물의 질서(order of thing) 자체가 정현의 미술을 결정화하는 절대적 속성 중 하나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인간중심주의의 의미망으로 포착할 수 없는 객체다. 어떻게 우리가 아스팔트 길닦이에 쓰는 아스콘의 질적 상태를, 기찻길 침목들에 가해진 압력의 강도를, 녹슬고 삭고 붉은 부스럼을 일으키는 금속의 시간과 생태를 인간적으로 전유할 수 있겠는가. 비록 그 물질들이 정현이라는 미술가의 개입을 통해 산맥처럼 강인한 인간 육체의 누운 모습을 연상시키는 조각이 되고, 대지 위에 두 다리로 버티고 선 인간 군상을 암시하는 설치작품이 되고, 자코메티의 그것처럼 바짝 마른 남자 입상을 환기시키더라도 말이다.
물론 이런 논의는 작가의 미술이 그간 어떻게 전개돼왔는지를 살펴봐야 균형을 이룰 것이다. 2006년 국립현대미술관은 정현을 ‘올해의 작가’로 선정하고 개인전 개최와 함께 도록을 발간했다. 거기 글을 쓴 학예사 박수진은 작가의 작업세계에 대해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까지는 인체의 역동성이 표현상의 중심을 이루었다면, 1990년대 중반부터는 재료와 도구가 중심이 되면서 제작과정상의 우연성이 드러난다. 특히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는 재료의 물질성이 더욱 부각되는 시기”라고 설명한다. 나는 이러한 시기 구분에 동의한다. 하지만 2014년 현재 작가의 최근작을 고려하면, 그 변화의 핵심을 좀 더 구체적으로 추출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정현은 마닐라삼에 석고를 묻혀 골조를 만들고 그 위에 콜타르를 착색한 인체 조각에 매진하던 초기, 예술의 이름 아래 질료를 통치해 인간을 형상화한 것이 맞다. 하지만 점차 물질들의 본래 성질과 우연하고 가변적인 외적 조건에 자신의 예술적 의도와 표현 방식을 반향(echo)해가는 식으로 이행했다. 즉 작가의 조형적 목적에 물질들을 종속시켜 시각적으로든 의미상으로든 인간과 닮은 형상을 빚어내는 데서, 물질 자체가 발산하는 특성 및 주변 맥락에 작가의 의식과 감각이 메아리치듯 반응하는 식의 작업으로 나아간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얼마 전 17번째 개인전에 내놓은 ‘8톤의 파쇄공’에 이르러 정현의 조각은 한 사물의 존재부터 주어진 질서까지, 물(物) 자체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제시하는 미술의 완성형에 거의 도달한 것 같다. 인간 형태적으로(anthropomorphic) 전유되거나 인간중심적 의미로 해석되기 전에 물질이 가진 자체의 속성과 외관, 그리고 그 물질이 온몸으로 겪은 전(全)역사를 긍정하는 미술이 그것이다. 이 미술은 그럼 비인간적인가? 이 미술에는 인간이 부재한가? 그렇지는 않다. 인간의 몸을 닮은 그의 1980~90년대 조각은 물론 격렬한 감정의 인간 얼굴을 연상시키는 요 근래의 드로잉들과 마찬가지로, 정현의 최근 조각에 인간은 근본 축으로 내재한다. 예컨대 파쇄공 조각처럼 물 자체인 작품에도 말이다. 다만 관계의 방식이 달라졌다.
이전 작품들이 말하자면 물질의 물질성을 녹여내 인간이라는 의미를 상징하고 표현하고 추상하는 데 창작 의의를 둔 것이라면, 현재의 작품은 물질에 대한 인간의 즉각적이면서 즉물적인 반향을 목표로 한다. 이때 반향의 첫 인간은 그 물질과 조우하고 거기서 예술의 가능성을 발견한 작가 자신이다. 하지만 그 물질이 일종의 ‘발견된 오브제’로서 미술작품으로 전시되었을 때 불특정 다수의 감상자가 얼마든지 그 인간에 해당할 수 있다. 그/녀는 거대한 크기와 무게감, 단단함, 그러면서도 긴 세월 강물에 잘 깎인 조약돌처럼 매끈함과 군더더기 없음을 갖춘 검은 파쇄공과 대면해 그 객체가 발현하는 객체성에 신경감응하며 특정한 상을 그리게 된다. 그 상을 우리는 감상자 주체의 주관에 따라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는 것이라 단정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예컨대 10년간 셀 수 없이 많은 횟수로 공중 낙하하면서 물리적으로 마모된 거대한 무쇠 공은 사람들에게 범접할 수 없는 위엄과 동시에 간단히 말로 할 수 없는 응축된 통증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상상력을 발휘해 의미를 그렇게 각색하는 것이 아니라(우리는 그렇게 착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는 그 쇠공의 지금 여기 상태에 감상자가 감응해서 부지불식간에 드는 판단이다. 그 판단의 근거는 보는 이의 주관과 심리에 있지 않고 대상의 질적, 물리적 상태로부터 발현돼, 보는 이의 지각과 의식에 현상되는 것이다. 그 점에서 나는 정현의 몇몇 조각에 에코그래피(echography, 照影)라는 용어를 적용하고 싶다.
에코그래피는 의학에서 ‘초음파 검사법’ 또는 ‘초음파 조영술’ 등으로 불리는 진단법인데, 쉬운 예로 태아의 초음파 사진처럼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신체 내부의 상태를 고주파를 이용한 반향그래프(echo-graph)로 알아내는 방식이다. 데리다는 이를 철학적 논쟁에 도입해 인간과 텔레비전 사이의 상호작용을 내재적으로 분석한 바 있다. 그와 비슷하게 나는 에코그래피의 방식이 우선 작가 정현과 그가 주목한 현실의 물질들 사이에 작동했고, 나아가 잠재적 관객의 미적 경험과 물 자체로 제시된 그 물질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유추해본다. 작가가 절반으로 마멸된 파쇄공, 해체된 침목, 부러진 철근 마디를 두고 “잘 겪은 시련은 아름답다”고 말할 때, 그러니까 그 아름다움은 의인화된 것이 아니라 정현이라는 인간의 눈과 피부에 투영된 물질의 질적, 외형적 상태다. 그것은 우리 앞에 일시적인 것으로 나타나지만 고유의 내력으로 그렇게 존재하게 된 것이며, 우리가 그렇게 여기는 것 같아도 사실은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느끼게 하고 생각하게 한다. 미의 주체와 객체 관계를 이렇게 역전시키고 복합화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정현의 최근 작업은 ‘인간’을 다른 지각의 조영술로 새롭게 조영(造營)하는 중이라는 비평이 개시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무엇이라 부를 수 없는 안대웅 · 『PUBLIC ART』 에디터 · 2014년 6월호
“엄지발가락은 인체 중 가장 인간적인 부분이다...발의 기능은 인간이 아주 자랑스러워하는 직립을 위한 견고한 기반을 구성한다...그러나 그의 발로 서서 어떤 역할을 하건, 인간은 가벼운 머리를 가지고 있다...상승하는 것은 가치가 있고 우월하다고 생각하며 인간생활을 상승에 맞추려 한다...인간의 생활에는 불결한 것에서 이상적인 것으로, 이상적인 것에서 불결한 것으로 넘나드는 사실에 대한 분노, 발과 같은 저열한 기관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다.”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 「엄지발가락(The Big Toe)」
가늘고 말라 비틀어진 조각이 있다. 스스로 지탱하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이 조각은 언뜻 인간을 닮아 불길하다. 더럽고 거칠어 보이는 표면은 위험해 보인다. 만지는 순간 사악한 주술에 걸릴 것만 같다. 이 조각이 환기시키는 것은 이처럼 ‘아름답지 않은’ 감각이다. 만약 고전 조각의 이상을 밤하늘의 별에 비유할 수 있다면 바타유를 따라 이 조각을 “엄지발가락”이라고 하겠다. 이처럼 정현의 조각은 조각의 비천함을 드러내는 조각이다. 조각을 해체함으로써 조각으로 나아가는, 그런 조각이다.
고양시 덕은동 한 촌락. 조선시대부터 살기 좋고 아름답기로 유명했다는 이 마을은 과거 쓰레기 매립지 용도로 쓰였던 난지도의 여파로 오래도록 방치돼 있었다. 아직까지 저개발 상태지만 조용하고 공기까지 상쾌해 작업하기는 딱 좋은 곳이다. 최근엔 그린벨트가 풀린 탓에 투기 열기가 한창인 모양이다. 새로 지어진 조립식 주택이 드문드문 보이며 새파랗고 쨍한 녹색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그곳에 조각가 정현의 작업실이 있다. 자연의 숭고함을 뒤로 하고 인간의 욕망을 앞에 둔 채, 정현은 오늘도 작업 구상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다.
이곳에선 아무리 둔한 사람이더라도 정현 작업의 요체를 직관적으로 알아차리게 된다. 작업실 뒤에 우두커니 서있는 대덕산이 근작에서 반복되어 나타나는 말라비틀어진, 왜소한 나무 이미지의 기원을 잘 대변한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면 어김없이 뒷산 숲길을 산책한다는 작가는 숲 속에서 자연의 치열함이 주는 경이를 발견했단다. “나무들끼리 햇빛을 더 많이 받으려는 경쟁이 인간사보다 훨씬 치열하죠. 겉으로 보기엔 아름다워 보이지만 안속으로 들어가 보면 말라비틀어지고 비바람이 불면 고꾸라져서 죽을 수밖에 없어요. 생존과 관련된 긴장감이 항상 감돕니다. 낭만적 풍광이 아니라 사람 사회보다 더 치열하게 투쟁하는 풍경, 그 거친 원시성이 마음을 끌어당기더군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나무를 그리게 됐어요.”
그가 조형해내는 앙상하고 메마른 나뭇가지와 풀, 뿌리를 연상시키는 폐철근으로 만들어진 조각의 뭉치는, 그런 점에서 아름답다기보다 추하다. 풍요롭기보다 척박하다. 부유하기보다 가난하다.
드로잉은 어떤가. 감각을 그때그때 쏟아내기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한다는 드로잉은 대부분 콩테나 콜타르로 후려갈기듯이 그렸다. 뾰족뾰족하고 거칠고 메마른 터치가 특징적으로 드러나는데 딱히 무엇이라 부르기 애매한 형상이다─말하자면 풍요로운 자연이라기보다 오히려 척박하고 황폐한 재앙으로서의 자연, 말라비틀어진, 더럽고 거친, 불규칙적인 표면, 건드리면 바스라질 것 같은 강도, 둔탁하게 다듬어진 (그런 면에서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덩어리감, 아찔할 정도로 여과 없이 드러나는 물질 그 자체, 기원, 꿈과 환상, 원시성에 대한 매혹과 동경.
최근 수년간 키워온 이런 생태에 대한 관심사는 사실, 정현이 청년 시절부터 천착해온 대주제인 ‘인간’에 대한 관심의 확장판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예술가라면 누구나 숙명처럼 안고 있는 기원에 대한 궁금증과 의구심을 평생에 걸쳐 탐구하고 있는 셈이다. 스스로 “그림도 못 그리는데 사고능력도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는 그는 유독 누구보다 자기반성에 치열했던 사람이었다. 80년대 사회적 혼란기 속에서 대학을 다닌 정현은 천성이 유약한 탓에 그 어느 편에도 서지 못했다. 홍익대 재학 당시 탈춤반에 들어가서 좌파 성향의 학우들과 어울려도 보고, 몇 번 데모에 가담도 해봤지만, ‘예술가로서의 나’의 길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고 한다. 계속되는 유보와 관찰. 그렇게 대학원까지 보내고 늦은 나이에 다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아 떠난 파리 유학길. 타지의 대학에서 정현은 혹독한 시험대를 거쳤다. 한국에서 배운 인체를 조형하는 숙련된 기술 자체가 파리에선 통하지 않았다. “너의 작업에는 시적 상상력과 철학이 안 느껴져”라는 질책을 가장 많이 들었다고 하니까.
정현은 인체를 만들고 부수기를 수없이 반복했다고 한다. 계속되는 거절의 거절. ‘나란, 내 작업이란, 조각이란 무엇일까’라는 기원에 대한 갈증. 나중에 가서는 급기야 손에 익은 헤라(조소 전문가용 칼)를 버리고 둔탁한 망치와 도끼를 들 수밖에 없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쇳덩이를 후려친다. 바로 그때, 정현은 번개를 맞은 듯한 인식론적 전환을 경험했다. 쪼개짐과 둔탁한 파임 속에서 이전까진 보지 못했던 새로운 형상성을 발견한 것이다─지금까지 고전주의적 이상적 인간 형상에 틀지워져 보지 못했던 다른 종류의 시각성, 아니 파괴적인 촉각성, 기원을 파괴하는, 그러니까 말하자면 형상에 반하는 (조르주 바타유가 “비정형”이라고 불렀을) 가장 낮은 단계의 (비)형상성.
비로소 정현은 낡아서 버려진 비천하고 저급한 것들에 매혹되기 시작한다. 대리석 안에 이미 실재하는 천사를 단지 꺼내기만 하면 된다고 믿는 미켈란젤로식의 이상주의보다, 재료가 겪은 시련과 세월, 변화와 이동의 작동 방식 그 자체─바타유식으로 말하자면 “한 마리의 거미나 침 뱉는 행위”─가 작업의 요체가 되었다. 정현은 이런 물질의 상태를 그대로 미술에 가져다 놓는다. 그렇게 해서 2000년대 초반부터 작업에 사용하기 시작한 철로용 침목은 오랜 세월 비, 바람과 육중한 하중을 견뎌낸 후 남은 폐자재이며, 2000년대 중반 작가가 불현듯 사용한 아스팔트 콘크리트 또한 석유의 가장 낮은 단계, 찌꺼기로 만들어진, 그마저도 닳고 부서져서 용도 폐기된 쓰레기다. 말라 죽어가는 썩은 나무를 끈질기게 드로잉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소마미술관 야외 공간에 전시한 쇠구슬 ‘파쇄봉’도 순수한 철을 정제하고 남은 폐철근과 불순물이 오랫동안 서로 엉겨붙은 결과란 점에서 맥락과 다르지 않다.
요컨대, 정현의 작업에서 표명되어온 인간에 대한 관심은 뒤집어진 인간주의라고 할 수 있다. 말라비틀어지거나 덕지덕지 엉겨 붙은 조각의 표면은 대개 게슈탈트적 차원에서 인간의 얼굴 같은 형상을 투사하게 만든다. 우리가 그 때 보는 것은 사실 두상이라기보다 비정형적인 조각의 표정이며, 오히려 신음이나 비명소리일텐데, 대부분 붙어있는 <무제(untitled)>라는 작업의 제목이 시사하듯 그러한 규정조차 한갓된 것이다. 이 모든 형상은 사실 인간이 아니다─저급한, 물질에 불과하다. 그 강력한 척박함이 이내 고개를 내미는 순간, (형상의) 죽음이 선언된다. 환기된 구문론적인 혼동─시각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인간적 형상과 실제 사물 사이의 기호학적 긴장 관계─과 함께 작업-물질의 저급함은 인간의 실존적 이상을 바닥으로 끌어내린다.
바타유는 어느 책에선가, 구석기 동굴벽화에서 인간 형상이 사실적인 동물 묘사와 달리 일관되게 훼손되거나 왜곡돼 있는 것을 두고, 인간의 예술 행위가 자기 훼손의 충동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한 바 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정현의 조각에서 나타나는 인간주의적 관심은 외려 인간 안의 반인간주의적, 원시주의적, 생태학적 관심으로 역전된다. 근작을 통해 그의 관심이 자연에 도달한 것은 어찌 보면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반인간적인 것으로서의 자연이며, 가장 저급한 수준으로서의 자연이다.
따라서 정현의 조각을 무엇이라 부를 수 없다. 아니, 불러서는 안 된다. 끊임없이 그 자신의 이상적 층위를 혐오하고 끌어내리는 과정 가운데서, 명사가 아닌 형용사로서 해체적으로 작동하는 수행으로, 바타유적인 의미에서 비정형 그 자체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모든 의미를 빨아들이고 무효화하고 저급화시키는 블랙홀이자 인간에 저항하고 생태로 나아가는 조각이다. 정현의 조각은 이런 점에서 한국 조각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비물질의 물질적 유비 조은정 · 미술평론가 · 『아트인컬처』
조각가 정현과의 대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힘’이다. 나는 그가 ‘힘’이란 단어를 사용할 때마다 무형의 강렬한 어떤 것을 물질로 형상화 한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는 분명 사전에서 설명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강렬하게 내부에서 솟구치는 무형의 에너지이자 그로 인해 다르게 변해버린 결과로서의 물체 자체로서 ‘힘’이란 언어를 채택하는 것이었다.
전시장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커다란 무쇳덩어리를 마주하였던 학고재의 개인전에서, 공간에 설치된 조각의 수보다 벽에 걸린 드로잉이 더 많았던 것은 그래서 당연해 보인다. 쇠를 때려 부수는 쇠공, 쇠의 부식을 막는 돌과 나무가 녹아내려 형성한 끈적하고 검은 액체 타르(tar), 타르가 스며들어 타르 자체처럼 보이는 침목(枕木). 응축되어 밀도가 높아져 폭발적 에너지를 갖게 된 물질들이 벽에서, 공간에서, 바닥에서 놀랍게도 부드러운 형상으로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 다른 물성들을 관통하는 원리는 에너지의 드러냄, 힘이었고 그것의 형식화에 집중되고 있었다.
벽에 걸린 일련의 드로잉들은 직접적으로 인간의 얼굴을 떠올리게 하거나 그렇지 않을 때조차 영혼의 형식화, 정신을 형상화하는 태도 자체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압축시킨 것이다. 특유의 냄새와 함께 돌과 비벼져 열과 압력이 가해져 돌처럼 견고하고 유연한 도로의 아스콘이 된 타르는 그 끈끈함의 성질로 종이와 쇠에 스며들어 인간의 모습을 드러낸다. 얼기설기 엮어 골조로 표현된 인체, 각목으로 쳐대어 드러난 인간의 형상 등은 인간의 외형이지만 아니기도 하다. 그 극단의 형상들은 지치지 않는 정신, 인고의 세월에 대한 흔적이기에 ‘형상화한 태도’의 어떤 것인 때문이다.
업악구조로 점철된 한국을 벗어나 프랑스에서 직면한 ‘태도’에의 요구에 그는 각목으로 석고를 무작정 패고 두들겨 감정을 드러내는 것으로 답하였다. 형태의 깨부숨이 도리어 형상이 된 것은 도로포장을 제거하던 길거리에서 들고 온 아스콘 조각을 바닥에 널부러뜨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십여 년간 뜨거운 마찰열과 무게를 감당해온 침목을 기찻길에서부터 받아 들고 와 도끼로 살을 발라내던 때도, 전봇대와 철근을 이어붙인 나무를 땅속에 박아세울 때도 어떻게 정신을 형상화할 것인가 즉 ‘영혼의 형식’화에 천착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물체에 ‘힘을 가해온’ 작가가 주물공장의 도구인 쇠공을 들고 와 전시장에 놓기까지에는 고심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2006), 100년 후에도 잊히지 않을 작가(조선일보 2008), 한국평론가협회 창작 부문 수장자(2009)가 선택한 ‘쇠공’은 물질에 대한 작가의 간섭 부재에 대한 비판이라는 위험도 예견되기 때문이다. 그런 우려를 불식하고 쇠공들은 그의 작업의 연장선에 놓였다. 두들기고 파내고 용접하는 행위가 감정의 드러냄이라면 물체 자체의 ‘흔적’은 물질과 에너지의 대결을 구체화한 형식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는 조각에서의 에너지를 “하찮은 것에서 발견되는 신성함, 날 것에서 나오는 생명력, 예측을 불허하는 이미지, 느닷없음, 비탄으로부터의 해방, 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헤매임들의 깊이”(박수진과의 대화)라고 정의내렸다. 그런 점에서 쇠공의 등장은 질료적인 만남이나 조우(遭遇)와는 다른 해방, 자유와 같은 상징의 틀을 입게 된다.
공사장에서 버려지는 각목으로 형상화된 인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뜯겨지는 아스팔트, 설치 기한이 지나면 버려지는 침목, 주물공장에서 용도폐기된 철근과 이제는 사라지는 전봇대 그리고 육중한 무게로 다른 쇠들을 변형시킨 쇠공이 긁히고 닳아 형태가 변하여 공중에서 내려지는 시점. 거기에 작가는 간여한다. 그 용도폐기의 순간에 물질은 작가의 정신을 입고 질료화 한다. 크기와 무게감, 시각적 체험만으로도 느껴지는 단단함으로 압도하는 쇠공은 날것이 주는 자유, 하찮은 노동의 신성함을 일깨운다. 노동가치가 끊임없이 하락하는 현대 한국사회에서 ‘조각가 정씨’가 선택한 쇠공은 꽤 괜찮은 노동자로서의 우리를 새삼 대면케 하는 것이다.
2006 올해의 작가 — 서문 김윤수 · 국립현대미술관장 · 영문판 번역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 전은 해마다 한국 미술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작가를 선정해 열어 온 전시다. 올해는 조각가 정현이 선정되었다. 새로운 장르와 매체가 끊임없이 유행하는 현대미술의 세계에서, 정현은 인체라는 전통적 주제를 통해 작품의 의미와 미감을 탐구한다.
거칠고 투박해 미완성처럼 보이지만, 그의 작품에는 삶과 인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담겨 있다. 작가가 해석하는 조각은 '힘'과 '에너지'다. 다시 말해 그것은 개별적 존재로서, 곧 자기 본질을 자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상을 품고 있다. 인체를 통해 힘을 표현하는 한편, 작가는 하찮은 것에서 감지되는 신선함, 날것의 생동감, 예측할 수 없는 이미지, 돌발성과 원초적 폭력성 등의 힘을 발견한다.
그 힘은 파편이라는 재료의 물성과 창작 과정의 우연성에서 길어 올린 것이다. 그는 철도용 침목, 아스팔트 콘크리트, 막돌, 석탄처럼 문명의 잔해라 할 만한, 전통적 조각 재료와는 거리가 먼 것들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이번 전시는 정현의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작품 세계를 일별하게 한다. 다섯 시기에 걸친 조각 60점과 드로잉 60점을 통해 형태와 재료의 변화를 보여 준다.
끊임없이 작품으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해 온 이 진실한 조각가의 내면세계를, 이번 전시가 관람객에게 경험하게 해 주리라 믿는다. 전시를 위해 아낌없이 노고를 기울인 작가에게 깊이 감사드리며, 귀한 작품을 내어 주신 소장가들과 애써 준 직원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올해의 작가 2006: 정현 박수진 ·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 영문판 번역
조각가 정현이 '2006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었다.
1995년 제정된 '올해의 작가'상은 한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작가에게 해마다 수여된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들의 선정을 거쳐 이듬해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 기회가 주어지며, 정현은 조각 분야에서 처음으로 이 상을 받은 작가다. 정현은 작업에서 주로 인체에 천착해 왔다.
대다수 현대미술가가 여러 시도로 형상의 특질을 실험해 온 것과 달리, 정현은 인체를 통해 예술 형식의 의미를 한결같이 탐구해 왔다. 그의 작품은 미완성처럼 보여 거칠고 투박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삶과 인간에 대한 진정한 고뇌가 담겨 있으며, 스스로 서 있는 개별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드러낸다. 작가가 해석하는 조각은 '힘'과 '에너지'다.
인체의 역동성을 통해 힘을 표현하는 한편, 작가는 창작 과정의 우연성과 재료의 물질적 실재성에서 힘을 발견한다. 하찮은 것에서 찾아낸 신선함, 날것에서 뿜어 나오는 생명의 힘, 예측할 수 없는 이미지, 돌발성과 원초적 폭력성 등이 그것이다. 그에게 하찮은 것이란 침목, 아스팔트 콘크리트, 돌처럼 전통적 조각 재료와는 거리가 먼 문명의 잔해를 말한다.
작가는 재료의 물성을 최대한 끌어내기 위해 '재료와 싸우기보다 재료와 논다'고 말하며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번 전시는 정현의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작품 세계를 일별하게 한다. 네 시기에 걸친 조각 60점과 드로잉 60점을 통해 형태와 재료의 변화를 보여 준다. 첫 작품은 그가 프랑스에서 유학하던 1985년부터 1990년대 초 사이에 만들어졌다.
그는 실제 형상을 왜곡하여, 골격과 근육처럼 양감을 드러내지 않는 몇 개의 압축된 선으로 역동적인 인체를 표현한다. 석고에 마닐라 삼을 입혀 표면에 팽팽히 당겨 붙임으로써 긴장감을 강조했다. 두 번째는 1995~1999년에 제작되었다. 눈·코·입이 없는 이 청동 두상과 토르소는 일그러진 채, 인간 존재의 고통을 드러내는 모호한 흔적을 무수히 품고 있다.
세 번째는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에 제작되었다. 침목으로 작업한 이 작품에서 인체는 거의 완전히 해체되어 추상에 가까워진다. 조각조각 찢긴 나무와 도끼로 자른 침목이 뒤엉켜 붙어, 금욕적인 삶을 견뎌 내도록 운명 지어진 존재로서의 인간을 드러낸다. 이 시기는 작품의 규모뿐 아니라 새로운 재료의 도입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네 번째 작품은 2004~2005년에 아스팔트 콘크리트, 가공하지 않은 돌, 석탄 덩어리로 제작되었다. 아스팔트 콘크리트로 만든 작품은 전기톱으로 격렬하게 잘라 낸 덩어리들을 결합한 인체 형상으로, 사용된 재료의 물질적 실재성만을 강하게 드러낸다. 또한 가공하지 않은 돌과 석탄 덩어리로는 추상적인 형상을 빚어냈다. 전통 조각에 동시대적 해석을 더하고 버려진 재료를 예술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정현의 작품 세계는, 오늘날 유행처럼 번지는 '새로움'의 미학을 되돌아보게 한다.
정현 인터뷰 양정무 ·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 영문판 번역
Q. 지금까지 선생님의 작업은 인체에 집중해 온 것 같습니다. 스스로를 '인체 조각가'라고 생각하십니까? A. 작업에서 인체 자체를 우선해 본 적은 없습니다. 제게 인체는 하나의 대상일 뿐입니다. 다만 인체가 삶을 표현하기에 좋은 대상이어서 택했다고 하겠습니다. Q. 선생님의 작업은 인체의 직접적 표현이나 미적 재현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과감한 실험을 시도해 온 동년배 조각가들에 비해 인체라는 전통적 주제를 고수하시는 태도가 눈에 띕니다.
A. 인체 조각은 사람들에게 매우 익숙합니다. 그래서 거기서 신선함을 찾지 못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저는 처음부터 신선함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그저 세상에 눈을 조금씩 떠 가듯, 인간의 다양한 삶을 조금씩 발견해 가는 것을 즐길 뿐입니다. Q. 현대미술가로서 신선함에 개의치 않는다는 말씀이 조금 의아합니다. A. 신선함에 몰두하는 것은 현대미술의 한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선함은 새것에만이 아니라 오래된 것에도 깃들어 있습니다. 제 경우 신선함은 저와 대상 사이의 관계를 바꾸려는 시도에서 찾아집니다. Q. 유학 시절의 작업은 선에 집중한 듯한데, 첫 개인전은 그 특징과 단절된 것처럼 보입니다. A. 두 작업 모두 '힘'에 바탕을 둡니다. 그 주제는 지금도 제 작업 속에 살아 있습니다. 때로는 선으로, 때로는 구체적 표현이 없는 모호한 덩어리의 형태로 나타날 뿐입니다.
유학 시절의 작업은 사실주의를 깨뜨리는 과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군더더기 없이 핵심에 다가서고 싶었고, 그것이 선으로 나타났습니다. 각각의 선은 갈가리 찢긴 정신의 사실적 존재를 뜻합니다. 그때에도 양감을 지닌 작업은 있었습니다. 쇳덩어리나 나무 방망이로 치고 두드려 구체적 형상을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었지요. 그 끝에서 감정이 응축되며 양감이 또렷해졌습니다.
그런 양감 있는 작업이 1992년 첫 개인전에서 나타났다고 봅니다.
Q. 지금까지 조각의 본질로 '힘'이나 '에너지' 같은 말을 써 오셨습니다. 최근 작업에 보이는 즉흥적인 태도를 삶의 힘을 더 생생하게 붙잡으려는 방식으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A. 드로잉을 하면서, 어떤 생각들을 모아 감정으로 만들고 그것을 온몸에 퍼뜨려 알맞은 도구로 재료에 가 닿게 하는 행위 속에 삶의 힘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짧은 한 구절이 긴 산문보다 더 강렬할 때가 많지요. 제가 드로잉을 하거나 쇠망치로 돌을 내리치는 행위를 즉흥적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겠지만, 저는 여러 의도를 품고 그 행위를 합니다. 말하자면 작업에서의 제 행위는 여러 생각을 모아 감정에 실어 풀어내는, 시를 쓰는 일과 같다고 하고 싶습니다.
Q. 지금까지 재료 선택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석고와 썩은 나무를 쓰기 시작하셨고, 최근에는 침목과 석탄, 여러 가지 돌을 쓰고 계십니다. 이 모두를 잇는 일관성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A. 청동이나 대리석만이 완성된 조각 작품의 재료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많은 조각가가 석고를 쓰지만, 대개 최종 작품을 위한 습작의 재료로만 여기지요. 저는 석고가 주는 신선한 느낌이 좋았습니다. 돈이 없었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침목, 아스팔트 콘크리트, 돌 같은 것들은 하찮고 보잘것없고 구하기 쉬웠습니다. 모두 시련의 세월을 겪고 그저 내버려진 폐기물이었지요. 저는 그 날것의 느낌, 살아 있음이 좋았습니다.
Q. 선생님을 키운 것은 흙이고 선생님을 표현하게 해 준 것은 침목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침목을 쓰게 된 계기는 무엇이며, 이 재료에 대해 어떻게 느끼십니까? A. 사실 작업에 쓰기 훨씬 전부터 침목이 지닌 엄청난 에너지를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버려진 침목을 보았는데, 오랜 세월 레일의 육중한 무게와 비바람을 견뎌 온 그 고통이 생생하게 느껴졌습니다. 마치 한 인간이자 역사처럼 다가왔지요.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폐기물이지만 안에 엄청난 에너지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음에 들었지만 쉽게 작업할 수는 없었습니다. 저보다 더 강한 무언가를 보는 듯했던 것 같습니다. 짝사랑하듯 10년 넘게 침목을 바라보기만 해야 했습니다. 작업할 만큼 에너지가 쌓였다고 느껴 마침내 침목 작업을 시작한 것이 아마 1998년이었을 겁니다.
Q. 드로잉 작업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A. 처음의 감정을 되살리려고, 메모를 남기거나 일기를 쓰듯 드로잉을 합니다. 조각 한 점을 완성하는 데 몇 주가 걸리는데, 그 과정에서 튀어나오는 수많은 생각과 감정을 붙잡아 두기에 드로잉이 알맞은 방법이었습니다. 모델을 앞에 두고 작업하면 작품의 생동감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되도록 많은 드로잉을 앞에 놓고 작업하면서 바라보아 감정을 계속 느낄 수 있게 합니다. 그러면 감정을 억지로 만들어 낼 필요가 없습니다. 저절로 솟아나지요.
Q. 지금 한국 조각계의 전반적인 모습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습니다. 조각이라는 매체 자체가 죽어 가고 있지요. A. 조각이 쇠퇴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특히 쇠퇴하고 있는 것은 '재현적이고 사실적이며 기념비적인 조각'입니다. 한편으로 최근의 매체 확장과 장르 이탈의 실험 속에서 조각의 영역은 오히려 넓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제 조각을 생성의 원초적 지점으로 되돌아가는 조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말하자면 '앞과 뒤가 만나는 지점의 조각'입니다. 저는 조각이라는 매체의 주인이 아니며, 이미 전통 조각의 한계를 넘어섰고, 조각이 배제해 온 영역을 되살리려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Q.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A. 쓸데없이 심각한 작업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무거움을 바꾸어 가볍게 드러내는 방법을 찾고 싶습니다.
조각에서 자기-조각으로 유헌식 · 철학자 · 영문판 번역
정현이 최근 몇 년간 관심을 기울여 온 재료는 대부분 '별것 아닌 것'들이다. 쓸모를 다한 철도 침목이거나, 쓰임을 기다리는 석탄이다. 어째서 별것 아닌 것에 끌리는가. 그것들은 이미 쓰였거나 쓰이는 중이라 세련되지 않았다. 단순하고 투박하다. 사실 진실한 것은 단순하고 투박하다. 갓 만들어진 것은 중심을 꿰뚫지 못한다.
그래서 그가 쓰는 재료는 중심에서 밀려났거나 아직 중심에 이르지 못한 것들이다. 여기서 '중심'이란 실용적 가치를 말한다. 정현은 실용성을 박탈당한 재료에서 미적 가치를 빚어내려 한다. 이 재료들이 실용적 가치 이전과 이후에 존재로서 주어진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무엇인가'이며 동시에 '아직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서 자기 존재를 주장할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작가는 실용성과 구별되는 미적 생명을 확보하려 한다.
그에게 재료는 더 이상 한낱 사물이 아니다. 그는 재료에 주체적 존재의 자리를 부여한다. 동시에 형상인(形相因)에서 벗어나 실체적 원인으로 그것들을 또렷이 구현한다. 마침내 재료는 자신의 존재를 본래의 모습 그대로 실현해 줄 사람, 정현을 만난다. 그의 손을 거쳐 재료는 천천히 제 몸과 얼굴을 드러낸다. 팔을 벌리고 서 있거나 손으로 버티고 선 것은 인간이 아니라 침목이다.
누워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아스팔트다. 침묵에 잠긴 어두운 사물은 인간의 얼굴이 아니라 석탄의 얼굴이다. 작품의 명목상 주인은 작가 자신이지만, 실제 주인은 쓰인 재료다. 스스로를 깨울 힘이 없는 재료에, 작가는 손과 힘을 빌려주어 다시 태어나게 한다. 재료 안에서 찾지 못한 길은 재료 밖에서도 결코 찾을 수 없다.
오직 작가의 서술만이 재료에 생명을 불어넣어 의미 있는 작품을 빚는다. 작가에게 재료는 수단이다. 재료 자신에게는 그것이 목적이다. 그 목적은 작가의 미적 감수성을 빌려 실현된다. 그래서 침목, 아스팔트 콘크리트, 석탄, 철판을 쓴 연작에서 드러나는 외적 측면뿐 아니라, 각 재료에 깃든 이야기를 끌어내는 내적 측면에도 방점이 찍힌다.
나는 정현 작품의 이러한 특성을 '자연주의적 서사성'이라 부른다. 정현의 정신과 작품에 깃든 이 고유하게 한국적인 자연주의적 서사성에 온 세계가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란다. 다만 내 관심은 그 자연주의적 서사성의 '내용'에 있다. 정현이 '한국의 조각가'로 당당히 자신을 소개하려면, 그의 작품 내용에 '한국적 명랑함과 흥겨움'의 요소가 더해지기를 바란다.
그의 작품 서사는 전체적으로 어둡고 침울하다. 한국은 그저 슬프고 비장하기만 한 나라가 아니다. 민담과 설화에 담긴 해학과 풍자는 밝고 유쾌한 세계의 이야기를 전한다. 재료가 무겁다고 해서 내용까지 무겁고 비장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 한구석에서 솟아오르는 희망의 메시지를 보게 되기를 기대한다.
사물의 실재와 존재의 실재 최태만 · 국민대학교 교수 · 영문판 번역
정현의 조각은 인간의 형상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예로부터 인체는 중요한 소재였다. 특히 고전 미술에서 인간의 형상은 이상적 아름다움을 함축하는 주제로 다루어졌고, '우주의 축소판'으로 인식되곤 했다. 그러나 정현이 표현하는 인체는 그러한 전통 조각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의 작품은 형태가 거칠고, 동원되는 방식은 격렬하며 때로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이 '길들지 않은 강렬함'은 재료뿐 아니라 인간 존재의 실재성을 더해 주는 중요한 요소다. 먼저 재료의 실재성은 석고, 침목, 아스팔트 콘크리트 같은 재료의 물성이 고스란히 노출되는 그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특성이다. 석고 작업은 가소성이 높은 흙덩어리를 쇠막대나 삽 같은 도구로 치고 파내어 만든다.
이런 폭력적인 과정 덕분에 작품은 단단한 형상을 갖춘다. 분명 인체나 얼굴의 형태이지만, 거기서 구체적인 형상을 찾아내기는 어렵다. 전통적인 살붙이 도구로 신체의 외형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재현하던 방식을 거스름으로써, 작가는 굳어 버린 재현의 전통, 곧 아카데미즘에서 벗어난다. 오랜 세월 무거운 철로를 떠받치다 버려진 침목이나 현대 도시의 상징인 아스팔트 콘크리트로 빚은 인체 조각 역시 폭력적이고 거칠며 표현주의적이다.
전기톱이나 그라인더 같은 강력한 도구로 침목이나 아스팔트 콘크리트를 켜고 잘라 표면의 질감을 드러낸 작업은, 재료의 물질적 실재성을 극도로 강조해 제시된다. 이런 작품을 통해 우리는 최소한의 인간 형상뿐 아니라 재료 그 자체의 실재성도 경험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조각에 대한 작가의 사유와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행위,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형태가 하나로 묶여 조화로운 전체를 이룬다는 사실이다.
재료를 거의 폭력적으로 다루는 듯한 그의 격렬한 작업 과정은, 그러나 재료의 물성을 제거해 '승리'를 거두려는 공격이라기보다 어떤 측면에서 재료와 하나가 되려는 암시적 특성을 드러낸다. 정현은 이 노동의 과정을 '재료와 놀기'라 표현한다. 어쩌면 그것은 작가의 감정과 사유, 이념이 재료의 생생한 물성과 합일되는 일종의 신들림, 혹은 그 연장(延長)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작가가 빚은 형상은 신이 존재하던 시대의 토템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아무리 재료를 거칠게 다룬다 해도, 작가는 한 번 버려졌던 재료를 다시 버리지 않는다. 침목과 아스팔트 콘크리트는 제 물성과 특성을 훼손당하지 않은 채, 작품의 주된 요소로서 제자리에 선다. '재료와 놀기'는 그가 재료를 지배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재료와 하나로 어우러지려는 작가의 의도를 드러낸다. 작가가 빚은 인간 형상은 우리에게 특정 대상을 떠올리도록 지시하지 않는다. 다만 침목이나 아스팔트 콘크리트가 자아내는 정서적 감응이 축적된 시간, 곧 고난을 견뎌 낸 시간이자 제 몫을 다하려 묵묵히 인내한 침묵의 시간이기에, 그의 인간 형상은 존재의 실재를 드러낸다. '시간의 숙성'으로 닳고 해졌으나 여전히 존엄을 지키는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곱씹게 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작가 — 정현 최종태 · 김종영미술관장 · 영문판 번역
'오늘의 작가' 전은, 작가이자 교육자로서 한결같이 작업에 정진한 김종영의 정신을 잇고자 김종영미술관이 젊고 재능 있는 작가를 발굴하고 격려하기 위해 마련한 전시다. 우리 미술관은 해마다 독자적 시각과 작업에 대한 헌신을 보여 주는 작가를 두 명 이상 '오늘의 작가'로 선정해 개인전에 초대한다.
이로써 김종영기념사업회가 1990년부터 시행해 온 '우성 김종영 조각상'과 더불어, 한국 조각의 발전에 중심축이 되기를 희망한다. '오늘의 작가'는 뛰어난 작업으로 조각이라는 매체에서 큰 가능성을 보이는 작가로서, 김종영미술관만의 독자적이고 고유한 기준에 따라 신중히 선정된다.
그 목적은 젊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작품 발표의 장을 제공하여, 후학 양성에 각별히 헌신했던 김종영의 뜻을 잇는 데 있다. 올해 첫 '오늘의 작가'로 선정된 조각가 정현은, 침목을 이용해 거칠고 강인한 인간 형상을 빚어내 이미 비평적 주목을 받아 왔다. 침목은 조각 재료로는 어울리지 않아 보일 수 있으나, 정현은 전기톱으로 표면을 자르고 선명하고 날카롭게 베어 인체의 기본 형태를 빚어냄으로써 구상 조각의 전통을 바꾸어 놓는다.
정현의 침목 조각이 주목을 끄는 것은 낯선 재료의 사용뿐 아니라 그 재료가 지닌 상징성 때문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위에서 짓누르는 육중한 기차의 무게를 견디며 비와 바람, 먼지와 기름때를 묵묵히 받아 낸 재료를 떠올릴 때, 우리는 인류 역사 속 침묵의 견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전시에서 정현은 조각에는 또 하나의 낯선 재료인 아스팔트를 다룬다.
석유 아스팔트라 불리는 이 인공적인 문명의 부산물은, 유전에서 석유를 걸러 내고 남은 검은 찌꺼기다. 접착력이 매우 강하지만 온도에 몹시 민감하며, 건물과 도로 포장에 널리 쓰이면서도 조각 재료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정현은 도로 공사장에서 파낸 아스팔트 덩어리를 모아 그라인더 같은 도구로 잘라 내거나 표면에 날카로운 칼집을 내어, 누워 있는 인체 형상을 빚는다.
여러 개의 아스팔트 덩어리로 이루어진 인체 형상은 거대한 돌 얼굴을 닮아, 자연 속에서 인간의 형상을 찾는 우리의 상상을 자극한다. 그의 작품은 시점을 달리할 때마다 새로운 면모를 드러낸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누워 있는 인체가 보이지만,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마치 너른 바다에 돌섬들이 모여 있는 듯하다. 그의 작품은 자연과 인체의 형태를 동시에 지니며, 침목 작업이 보여 주듯 날것의 재료와 단단한 양감이 빚어내는 살아 있는 형상을 지향한다.
조각뿐 아니라 드로잉에서도 정현은 생동하는 활기찬 선과 대비되는 색조로 넘쳐흐르는 인간 정신의 에너지를 그려 낸다. 정현의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거칠고 단순하지만, 그 안에서 죽음과 재생이라는 자연의 질서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특질은 '예술은 유한한 공간 안에 무한한 질서를 창조한다'는 김종영의 잠언과 완벽히 부합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미술관이 김종영이 추구한 이상을 작품으로 실현해 낸 작가로 정현을 선정한 까닭이다. 김종영미술관의 '오늘의 작가' 전이 한국 조각의 발전에 작은 보탬이 되겠다는 큰 뜻을 이루어 나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여러분의 격려와 가르침을 기대하며 감사드린다.
정현, 그리고 조각의 긍정 김원방 · 미술평론가 · 영문판 번역
정현 조각 속의 인간 형상
정현의 조각은 흔히 '인체 조각'으로 분류되어 왔다.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1992년 첫 개인전 이래의 작업, 2000년 무렵 침목으로 구성한 작업, 이번 김종영미술관 전시를 위해 준비한 아스팔트 콘크리트 작업, 그리고 드로잉에 이르기까지 두루 살펴보면, 인체의 형태가 그의 예술을 알아보게 하는 특징임은 분명하다.
작가 자신도 자신의 작업이 인체 연구에서 출발했으며 여전히 인체의 조각적 재현이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그는 '조각을 통해 인간과 인체를 다시 들여다보고 재해석하려 한다… 인체로 할 일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그것은 결코 지나간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작업은 또한 '위기와 절망 앞에 선 인간의 실존적 상태'나 '겉껍질을 한 꺼풀 벗겨 낸 오늘의 우리 자화상'으로도 널리 읽혀 왔다.
때로는 그의 작업을 설명하기 위해 '금욕주의(stoicism)' 같은 용어가 제시되기도 한다. 특히 침목으로 구성한 작업은 일종의 오랜 '금욕'과 관련지어 논의된다. 정현 자신도 '침목은 위에서 기차가 짓누르고 아래에서 자갈이 파고드는 가운데 오랜 세월 눈보라와 비바람을 견뎌 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 말한 바 있다. 정현의 조각이 인체 및 인간 실존과 관련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그 작업에는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
정현의 작업에서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인체와 인간 실존, 다시 말해 작업의 인간적·구상적 측면이 작업의 궁극적 목표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작업에서 인체의 형태는 그저 희미하고 미묘한 존재감만을 지니며, 삽으로 흙을 빚어 떠낸 석고 작업, 도끼와 전기톱으로 깎은 침목 오브제, 그리고 이번 전시의 아스팔트 콘크리트 조각이 보여 주듯, 인체는 재료를 향한 격렬한 조각 행위 속에 거의 파묻혀 버리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인체의 형태와 인간적 요소는 정현 조각의 부분적 측면을 이룰 뿐이며, 이 부분적 측면에 대한 비판적 기술이야말로 정현 작업의 특질을 연구하는 출발점으로 보인다. '정현의 조각은 어느 정도까지 인체에 관한 것인가', '인체는 어떻게 스스로를 드러내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인체가 아니라면 이 작업은 또 무엇에 관한 것인가' 같은 물음을 던짐으로써, 우리는 '인체/비(非)인체', '조각의 현전/조각의 부재'라는 구조화된 경계의 역동적 이동 속에서 그의 작업을 식별하고 분석할 수 있다.
프랑스 유학 시절, 정현은 한국에서 해 오던 사실주의적 조각을 버리고 각목과 쇳덩어리, 삽 같은 도구로 흙을 거칠게 빚기 시작했다. 작가는 이 시기를 아카데믹한 조각을 뒤로한 전환점으로 여긴다. 그는 인체를 단지 '대상'으로 사고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그의 조각은 인체 재현이라는 목적론적 관심에서 돌아서서 '인체가 설정한 제한된 조건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놀이'의 형태를 띠기 시작한다.
인체가 단지 '대상'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인체의 형태가 최종 목표가 아니라는 뜻이지, 그의 작업이 인체에서 완전히 등을 돌린다는 뜻은 아니다. 정현의 이전 작업은 물론 전기톱으로 뜯어낸 아스팔트 콘크리트 덩어리로 만든 새 작업에서도, 아무리 희미할지언정 주검과도 같은 인체의 윤곽이 자리한다. 이 인체의 현전은 돌무더기를 쌓아 놓은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이는 '한 걸음 물러선 구상 조각'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 조각적 후퇴는 새로운 측면을, 곧 인체와 그 인간적 외형에 초점을 둔 인식론적·지성적 독해가 놓쳐 온 핵심 요소들을 끌어낸다. 두드러지는 것은 격렬하게 뒤엉킨 춤이라 할 만한 것이다. 재료에 가해지는 힘과, 그 힘에 저항하는 재료 사이의 춤. 꿰뚫리고 켜진 응축된 돌무더기, 잘려 나간 아스팔트와 돌의 단면 — 이것들이 바로 그 춤의 현현이다.
그러나 정현의 작업이 오로지 재료의 미학이나 재료의 표현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앵포르멜이나 추상 조각의 미학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정현의 고유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재료와의 이 춤을 위한 장(場)이자 동시에 그 한계를 마련해 주는 일종의 무대가 있다는 점이다. 그 무대가 사실은 인체의 형태이며, 재료와의 춤은 오직 이 무대 위에서만 펼쳐진다.
이로써 그의 작업은 어느 한쪽 극단으로 환원되지 않고 물질성과 형상성, 몸과 정신을 함께 지켜 낸다. 나는 이 둘을 함께 품는 특성을 가리켜 '전체 조각(Whole Sculpture)'이라 부르고자 한다. 나아가 이러한 존재론적 위치를 '조각적인 것'으로 개념화할 수 있다.
'전체 조각'의 사이버네틱스: 인체에서 몸으로
재료와의 격렬한 춤이 겨냥하는 것은 인체의 복제가 아니다.
인체의 형태는 무용수 정현이 세운 임시 무대일 뿐이다. 무용수의 일이 무대의 형태를 베끼는 데 있지 않듯, 무대는 무용수의 관능적 운동 한가운데서 이따금 혹은 우연히만 제 경계를 의식하게 된다. 전체 조각의 총체성(게잠트쿤스트베르크 개념과는 무관하다)은 춤과 그 무대, 곧 조각적 재료의 미학과 그 재료가 표상하는 형태를 함께 보존한 결과다.
정현의 조각적 형태는 분명 실존적 견딤의 격렬한 과정을 떠올리게 하지만,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전체의 보존을 지탱하는 춤의 강렬함과 견딤에 진정 주목해야 한다. 그것이 사실은 조각 그 자체의 강렬함이자 견딤이다. '전체 조각'의 현장에는 인체로 이르는 두 갈래 길이 있다. 하나는 '재현된 인간 형상', 곧 '인체'이며, 다른 하나는 그러한 인체 및 그 재료와 더불어 춤추는 무용수(곧 작가와 관객의 관계에서의 주체)다.
전자가 시각적 지각의 대상에 불과하다면, 후자는 오직 '지금 여기'에서 일인칭 '나'로서 존재한다. 후자는 '바로 이 순간 내 앞에 놓인 아스팔트 덩어리의 날카로운 굴절에 감각적으로 몰입한, 직접 참여하는 나'다. 침목 작업을 시작했을 때 정현은 과연 재료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지 스스로 묻곤 했다. 이와 관련해 조각가들은 흔히 '재료가 저항한다'는 표현을 쓴다.
이러한 표현은 물질의 자연 상태를 늘 인공적 형태로 바꾸어야만 하는 남근적(phallic) 문화와는 무관하다. 오히려 '이긴다', '저항한다'는 말은, 차가운 시각성을 넘어 대상과 신체 감각을 주고받는 일종의 '사이버네틱스'를 표현하려는 조각가들의 현장 용어다. 정현은 그 조각적 사이버네틱스의 현장을 지치지 않고 보존하며 강조하는 작가다.
정현 작업의 핵심은 인체의 문제가 아니라 몸의 문제다. 비록 이 몸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와 대상 사이에 격렬한 상호 교환이 일어나는 내 현전의 온 영역을 가리킨다. 정현의 재료는 아슬아슬한 균형과 재료의 자기 보존, 그리고 재료에 가해진 엄청난 무게의 흔적이 만들어 낸 소용돌이에 휘말린 채, 누군가의 얼굴이나 자세를 베끼려는 듯 끝없이 분투한다. 조각은 본래 '재현과 그에 반항하는 재료 사이의 상호작용'이었다(미켈란젤로와 메다르도 로소를 떠올려 보라). 그러나 미술사에서 대다수의 조각은 어느 한쪽의 극단적 승리를 추구했다.
사실주의 조각에서는 '특정한 인체', '어떤 행동을 묘사하는 자세', '어떤 역사적 사건'을 만들어 낸다는 인식론적 목적을 위해 조각의 사이버네틱스적 움직임이 흔적도 없이 지워진다. 반대로 미니멀리즘 같은 경우에는 인체의 형태가 제거되고, 과도한 자의식 상태에 놓인 재료 그 자체가 드러난다. 정현은 이 두 극단이 뒤엉킨 현장을 보존한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흔히 구상 조각이라 여기는 것이 이미 거기 있었거나(먼저 존재했기에 지금의 상태는 그 인체가 파괴된 형태로 읽힌다), 앞으로 이루어질 것 같은(그래서 곧 사실적인 인체가 모습을 드러내리라 기대하게 되는) 상태다. 이전과 이후의 성질을 동시에 지닌 이 상태를 되도록 오래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정현 예술의 과제다. 그처럼 위태로운 자리에 놓인 조각이 바로 '조각의 실재'이자 '전체 조각'이기 때문이다.
같은 분석을 정현의 드로잉에도 적용할 수 있다. 그의 드로잉은 조각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사람의 머리 모양을 그린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끈적한 먹으로 가한 힘의 흔적, 반복되는 선, 그 '머리'에서 터져 나오는 에너지가 보인다. 이 모든 요소는 도끼와 톱날이 남긴 날카로운 자국을 지닌 그의 조각에서 느껴지는 것과 같은 생리적 흥분과 고동치는 리듬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서도 정현은 사람의 머리를 주어진 대상으로 여길 뿐이다. 드로잉은 어떤 에너지를 내뿜는 사람 머리의 형태를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격렬한 신체적 사이버네틱스 한가운데서 간헐적으로 지각되는 무대의 경계일 뿐이다.
정현 드로잉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일종의 영화적 애니메이션의 성질을 지닌다는 점이다. 드로잉을 필름 릴처럼 차례로 늘어놓으면 한 장 한 장은 영화의 스틸 사진 같지만, 한데 모아 보면 머이브리지의 인체 동작 연구나 조이트로프를 떠올리게 하는 움직임의 전개가 나타난다. 이 움직임의 감각은 나의 모든 생리적 감각을 동원해 읽는 일, 곧 체험하는 일에서 비롯되며, 그것이 정현 작업의 사이버네틱스다.
조각의 긍정을 향하여
올해의 '오늘의 작가' 전이 정현의 작업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그의 작업에 따라붙어 온 비평적 수사들이 아예 사라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더 넓은 맥락에서 다시 검토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과감히 인체 하나만을 추구하는 작가'나 '현대 사회에서 낙담한 인간 정신의 초상' 같은 표현은 비평 이론의 관점에서 본 주제론적 논의에 지나지 않는다. 그보다 그의 작업은 조각 그 자체에 대한 깊은 탐구와 직관을 비롯한 고유한 방법론, 그리고 초기작부터 지금에 이르는 전혀 다른 실험들이 딛고 선 더 큰 전제로 주목받아 마땅하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가 '낡은 인체 조각가가 아니라 매우 전위적인 개척자'임을 알아보게 된다.
형식 미학이나 낭만적 상징주의를 둘러싼 논의에 쉽게 휘말리는 구상 조각이라는 장르에서, 정현의 작업은 중층적 읽기의 가능성과 신체적 사이버네틱스를 강조함으로써 '조각 그 자체의 힘'과 '조각의 실재성'으로 초점을 되돌린다. 그것은 니체가 말한 '긍정'을 지향한다. 긍정은 승인이나 설득 같은 이성적 행위가 아니라,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본래의 전체성을 온전히 회복하는 신체적 운동을 동반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정현은 조각이라는 매체 자체에 대한 바로 그 긍정을 통해, 그리고 그 긍정을 다시 긍정하기 위해, 매번 맨 처음에서 시작하는 반복의 조각가다.
보도 — 주요 잡지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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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bc '문화사색' 철학자 강신주의 현대인의 인정 투쟁과 뒷이야기 공개! (새 창) 2018.05.25
- 뉴스핌 견뎌낸다는 것, 다시 선다는 것…정현의 조각세계 (새 창) 2018.05.14
- 세계일보 “혹독한 시련을 견딘 폐침목·대들보… 그 스스로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죠” (새 창) 2018.04.17
- 국방일보 '꿈틀' 세월 견뎌낸 기찻길의 환골탈태 (새 창) 2018.04.15
- 매일경제 300년 한옥의 대들보·철로 폐목…예술이 되다 (새 창) 2018.04.13
- 뉴스1 수명 다한 대들보 수백년 세월 돌아 미술관에 오다 (새 창) 2018.04.12
- 아트인포 조각가 정현, 버려진 재료로 현대 사회를 이겨내며 살아가 2018.04.12
- 이코노미톡뉴스 정현, 폐목재로 현대 사회를 이겨내며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삶 표현 (새 창) 2018.04.12
- 연합뉴스TV 버려진 침목ㆍ글자의 재해석…이달의 전시 (새 창) 2018.04.11
- 뉴시스 테니스 정현 말고 조각가 정현...금호미술관 개인전 (새 창) 2018.04.10
- 연합뉴스 조각가 정현 "시련이 잘 들러붙은 폐침목서 숭고함 느껴" (새 창) 2018.04.10
- 서울경제 누가 이들을 쓸모없다 했는가 (새 창) 2018.04.10
- 파이낸스투데이 조각가 정현 폐기된 대들보를 목공소에서 우연히 발견 조각품으로 소생 (새 창) 2018.04.10
- 헤럴드경제 “찢겨지고 부러진 나무…곤란한 삶의 모습같지 않나” (새 창) 2018.04.10
- 서울신문 쓸모 다해 버려진 잔해들, 인간의 삶 되새기다 (새 창) 2018.04.10
- 한겨레 버려진 대들보가 내뿜는 시간의 힘 (새 창)
2017 3
- 서울신문 나무와 마주한 조각가...‘전후 한국 현대 목조각의 흐름’전 (새 창) 2017.10.12
- 뉴시스 '우현학술상' 김상엽 미술사학자, '우현예술상' 정현 조각가 (새 창) 2017.08.23
- 서울경제 조각가 정현, 우현예술상 수상 (새 창) 2017.08.23
2016 7
- Artsy Chung, Hyun's Solo Exhibition 정현 개인전 2016.10.14
- 뉴스1 프랑스의 6월 초, 한국 문화로 물든다 - (새 창) 2016.05.26
- 서울경제 한불수교 130년…정현·바비에 양국 수도서 전시 (새 창) 2016.04.17
- 뉴시스 조각가 정현, 서있는 사람 50점... 파리 팔레루아얄궁에 전시 (새 창) 2016.03.29
- 연합뉴스 조각가 정현, 파리 팔레 루아얄 정원서 개인전 (새 창) 2016.03.29
- 스포츠서울 佛 파리 팔레루아얄정원에서 조각가 정현 ‘서있는 사람’전 개최 (새 창) 2016.03.29
- 아주경제 헝가리에서 만나는 한국 현대미술 (새 창) 2016.02.12
2015 9
- 기호일보 仁川 김병종·김경인·정현 예술가 (새 창) 2015.11.24
- 시민일보 인천시, 미술 분야 인천인 작가 초대전 개최 (새 창) 2015.11.23
- 일요신문 종로구, 10월 22일부터 3개월간 ‘춘곡 고희동 50주기 특별전’ 개최 (새 창) 2015.10.22
- 아시아경제 최초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 50주기 특별전 (새 창) 2015.10.21
- 연합뉴스 권진규 아틀리에 첫 번째 기획전…정현展 (새 창) 2015.10.19
- 한국경제 예술의 옷 입은 송도…아트시티 프로젝트 공개 (새 창) 2015.09.08
- 헤럴드경제 한-불 상호교류의 해 한ㆍ프랑스 문화예술 현주소를 ‘발견’하다 (새 창) 2015.05.30
- 이데일리 포스코미술관, 개관20주년 기념 '철이 철철'展 (새 창) 2015.05.27
- CNB저널 [아트인 선정 전시]LIG 아트스페이스 ‘힐링 모자이크’전 (새 창) 2015.04.22
2014 17
- 매일경제 힐링 콘서트 최고의 맛, 최고의 조각 (새 창) 2014.11.03
- CNB 저널 [이 사람 - 정현 작가] “시련은 아름답다” (새 창) 2014.10.30
- 경향신문 상처난 쇳덩어리에 불어넣은 생명… 조각가 정현 ‘정현’전 (새 창) 2014.10.27
- 동아일보 고미석의 詩로 여는 주말 가을 (새 창) 2014.10.25
- 이데일리 닳아빠진 쇳덩이·녹내린 캔버스, 예술되다 (새 창) 2014.10.24
- 서울경제 정현조각가, 홍익대교수 (새 창) 2014.10.24
- 서울신문 인고의 세월을 견뎌온 쇳덩어리 (새 창) 2014.10.21
- 문화일보 鐵의 노래… 녹물로 새긴 세월 (새 창) 2014.10.21
- 헤럴드경제 “녹물로 새긴예술 감상하세요”조각가 정현 개인전 (새 창) 2014.10.20
- 매일경제 조각가 정현 "제대로 된 시련은 오히려 아름답죠" (새 창) 2014.10.17
- 머니투데이 16톤에서 8톤으로…재료를 깨뜨리고 뭉갠 상처의 조각들 (새 창) 2014.10.17
- 한국경제 쇳덩이 부수고 깨는 파쇄공…격정적인 현대사와 닮았죠 (새 창) 2014.10.16
- 연합뉴스 시련을 잘 겪은 뒤의 것들은 언제나 아름답다 (새 창) 2014.10.14
- 연합뉴스 조각가 정현 "잘 겪은 시련은 아름답다" (새 창) 2014.10.14
- CNB 저널 정현 작가 '삶의 모든 시련을 작품 속에 담았다' (새 창) 2014.10.14
- 연합뉴스 제28회 김세중조각상에 정현 (새 창) 2014.06.20
- CNB 뉴스 조각가 정현, 2014년 제28회 김세중조각상 본상 수상자 선정 (새 창) 2014.06.17
2013 5
- 헤럴드경제 ‘파워와 아름다움’은 어디서 오는가? 소마미술관 ‘Power & Beauty’전 (새 창) 2013.07.23
- 서울경제 힘은 아름다움과 선함의 조화 (새 창) 2013.07.14
- 스포츠월드 올림픽 25주년 기념 소마미술관 ‘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가’전 (새 창) 2013.07.04
- 인천일보 지역미술 '발전·화합' 밑거름 되다 _ 2013.07.02
- 경인일보 선광미술관 개관 기념 지역 작가 33인 '인천愛전' (새 창) 2013.06.23
2011 12
- 아주경제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전 23명 누굴까 (새 창) 2011.08.12
- 경향신문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 23인 한자리 (새 창) 2011.08.11
- 경향신문 공부하는 예술가의 진중한 시선 (새 창) 2011.08.11
- 천지일보 15년 되짚는 ‘올해의 작가 23인展’ 미술후원제 확립 (새 창) 2011.08.09
- 아주경제 예술가들의 내면세계 탐구, 사비나미술관 'STUDY'展 (새 창) 2011.07.27
- 동아일보 작품으로 확장된 드로잉의 깊은 맛 (새 창) 2011.07.12
- 경향신문 긋는다 존재의 시작, 한 획… 담는다 내 삶을, 정신을 (새 창) 2011.07.07
- 서울경제 예술가의 창의성 담은 '한 획' (새 창) 2011.07.05
- 문화일보 드로잉, 작가의 사색 담긴 내밀한 일기 (새 창) 2011.06.09
- 서울경제 '실험작가의 산실' 21년 발자취 한눈에… (새 창) 2011.01.11
- 연합뉴스 평론가 23명, 작가 49명을 평하다 (새 창) 2011.01.04
- 한겨레 선, 혼을 담다 (새 창)
2010 18
- 매일경제 `한국 실험작가 산실` 금호미술관 개관 21주년 (새 창) 2010.12.12
- 연합뉴스 21년간 금호미술관을 거쳐간 작가들 (새 창) 2010.12.10
- 뉴시스 제일 잘나가는 조각가 65명 작품 한데 모았다 (새 창) 2010.12.09
- 연합뉴스 문화소식_ 갤러리SP, 조병왕전 2010.11.22
- YTN 한국 미술의 뿌리를 찾아서 (새 창) 2010.09.28
- 서울경제 현대미술과 古미술 다른 듯 닮은 매력 (새 창) 2010.08.31
- 문화일보 고미술-현대미술 시공 초월한 ‘교감’ (새 창) 2010.08.31
- 한국경제 알록달록 현대미술, 겸재·추사에 말을 걸다 (새 창) 2010.08.29
- 연합뉴스 한국 현대미술, 어디서 왔을까 (새 창) 2010.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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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경이코노미 ‘제2회 매경이코노미 명품 CEO 소장품 전시회’ 오프닝 이모저모 (새 창) 2010.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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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경이코노미 ‘제2회 CEO 소장품 전시회’ 엿보기 (새 창) 2010.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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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경제 절망·희망 공존하는 '깊은 울림' 2010.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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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경이코노미 [Who`s CEO?] 이용익 신흥 사장 (새 창)
2009 5
- 한겨레 금속으로 두드린 누천년 역사 (새 창) 2009.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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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2
- 매일경제 이영배ㆍ정현 동갑내기 작품전 (새 창) 2008.09.10
- 연합뉴스 학고재 이배전 정현전 동시 개막 (새 창) 2008.09.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