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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의 해방 혹은 탈주로 - 정현, 조각으로 철학하기

김종길 · 미술평론가

‘만들기’에서 ‘배치하기’로

정현의 조각은 일견 전통적인 조각개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처럼 인식된다. 그래서 그의 조각분석을 위한 이론은 자칫 지나치게 실존(주의)에 기대거나 조형적 형상론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이 실존과 무관하거나 형상성이 취약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너무 강해서 탈이라면 탈일까. 그래서 이론가는 해석의 편차를 넓히지 못하고 쉽게 그것에 매료되거나 자주 혼란에 직면한다.

정현의 조각을 입체적이면서도 사려 깊게 살피기 위해서는 ‘조각가 정현’과 ‘(정현) 조각의 개념’, 그리고 ‘(그의) 작품’을 분리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해석의 트라이앵글인 [조각가-조각개념-작품] 이 셋의 구도는 명확히 구별되기도 하고, 이론가에 따라서는 굳이 구별하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보통은 유기적으로 묶는 게 상식이다. 이 세 개의 개념적 주체들을 연결하는 것으로 이론가는 해석의 편리성을 획득하고 또한, 개념적 키워드를 추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셋을 유기적으로 묶을 수 없는 것이라고 전제하면 어떻게 될까? 요컨대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정현’은 조각가 정체성과 무관한 행보를 더 많이 할 것이다. 그는 오직 조각만을 위해 살아가거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가 작업실에 들어가 조각가로 돌변하는 순간 비로소 그의 조각가로서의 정체성과 조각개념은 발생할 터. 조각가 정현이 사회적 주체이면서 동시에 예술적 주체라면 그의 조각개념은 사회와 예술의 제도적 개념이되(‘조각’은 이미 사전적 개념으로 정의되니까), 동시에 그 개념으로부터 일탈하려는 ‘생성-의지’로서의 개념이고(‘탈-조각’을 지향하니까), 작품은 그런 주체와 ‘생성-의지’가 발현해 놓은 신생어(新生語)일 것이다. 우리는 그 일련의 과정을 ‘조각하기’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의 ‘조각하기’는 결과적으로 어떤 물적 토대위에서 시작되고 하나의 ‘물성’으로 발현되고 있지만, 그의 ‘조각하기’가 반드시 물성을 갖춘 ‘조각품’ 제작에 목적성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트라이앵글의 개념을 유기적으로만 해석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나는 그의 ‘조각하기’에서 몇 가지 특이점을 발견했는데, 그는 인간의 신체에서 조각형상의 뿌리를 길어 올렸으나 마닐라 삼으로 엮은 석고, 철로용 침목, 아스팔트용 아스콘, 그리고 건축용 철근으로 이어지는 재질의 변화와 이에 따른 ‘조형적 변이變異’를 통해 기존의 조각개념을 해방시키려 들뿐만 아니라 신체에 갇힌 ‘인간의 비극적 실존’을 탈주하도록 이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붙이고 두들겨 깎은 하나의 덩어리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부분들을 결합시켜 놓은 ‘배치’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의 조각은 만든 것들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 결과를 다시 흩뜨려 배치함으로써 완성된다. 다시 말해 그의 작품들은 유기적 전체를 위해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며 변용능력을 갖춘 부분들에 의해 ‘배치되는 것’이다.

그의 ‘조각하기’는 묶거나 다져진 흙․석고․청동으로 된 형상으로서의 어떤 덩이를 배치하기, 침목을 흩뜨려 배치하기, 아스콘을 흩뜨려 배치하기, 철근을 흩뜨려 배치하기로 풀어질 수 있다. 그는 이 ‘배치하기’를 위해 부분을 전체화하는 조각적 노동을 수행한다. 초기, 석고 작품을 위해 마닐라 삼으로 ‘묶는 행위’나 침목, 아스콘, 철근을 절단하고 붙이기 위해 사용한 전기톱과 용접봉은 그러므로 신체의 유기적 결합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분으로서의 기관들을 ‘독립시키기’ 위해 작동되었다. 그의 작품에서 신체와 부분적인 기관들은 하나일 수 없다. 부분은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그 자체로 전체이니까.

‘배치하기’와 ‘흩어지다’의 의미

그의 ‘배치하기’는 청나라 초기의 화가이자 이론가 석도石濤 주도제朱道濟가 지은 <고과화상화어록(苦瓜和尙畵語錄)>의 일획론一劃論 첫머리 “태고무법太古無法, 태박불산太朴不散, 태박일산太朴一散, 이법립의而法立矣.”에서 ‘산散’과 의미가 상통한다. 풀면, “아득한 옛날엔 법이 없었고, 큰 통나무도 쪼개지지(흩어지지) 않았다. 통나무가 한 번 흩어지니 비로소 법이 섰다.”인데, 여기서 ‘흩어지다’의 뜻은 인간의 유위적 행위를 가리킨다. 통나무가 순수 가능태로서의 기질이라면, 흩어진다는 것은 인간이 거기에 어떤 예술적 행위를 가한 것, 즉 유위행위인 것이다. 다시 말해 통나무가 흩어져야만(쪼개져야만) 조각이 생겨나고, 그런 ‘배치하기’와 ‘흩어지다’에 의해 미학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석고를 흩어지게 하고 침목을 흩뜨리는 것, 도로에 깔았던 아스콘을 흩뜨리고 철근을 흩어지게 하는 것 그 모두가 ‘배치하기’와 다르지 않지 않은가.

프랑스의 시인이자 연극연출가였던 앙토냉 아르토는 “신체는 신체다. 신체는 혼자이다. 또한 기관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체는 결코 유기체가 아니다. 유기체는 신체의 적이다.”라고 말했다. 질 들뢰즈의 그 유명한 ‘기관 없는 신체’는 아르토의 발언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첫 샘물은 바뤼흐 스피노자였지만. 들뢰즈는 “기관들도 전체를 형성하지만, 이 전체는 부분들을 통일하지도 전체화하지도 않으며, 부분들 곁에 있는 전체로서 산출된다.”고 했다. 아르토의 ‘신체’가 배우의 몸에서 파생된 개념이라면, 들뢰즈나 스피노자의 ‘신체’는 사회와 관계 맺는 인간의 몸 그 자체이다.

정현의 조각은 전자일까(조각적 대상으로서의 ‘몸’) 후자일까(사회적 인간으로서의 ‘몸’). 그의 작품의 시작이 1980년대 한국사회의 현실에 등기대고 있단 점에서 후자에 가깝지만, 거의 모든 작품들이 표현적 리얼리즘의 고갱이를 ‘시학적詩學的 조각’으로 응결한 것이란 점에선 전자를 포용한다. 배우는 몸의 기관들을 유기체에서 의도적으로 분리시키는 훈련을 통해 ‘대사’라는 말의 언어를 몸 전체로 확장한다. 손으로 혹은 발끝으로 말하고, 등으로도 말하며 머리끝으로 말하지 않던가. 스피노자를 빌리면 배우의 몸은 “능동적인 변용의 능력을 통한 부분들의 결합체”인데, 정현의 조각이 그렇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신체를 마치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려는 듯 엮어서 연결해 놓았지만, 실제로는 ‘자기보존과 생성의 욕망’을 가진 부분들을 ‘신체형상’으로 배치한 것에 불과하다. 자, 한 번, 다시 읽어보자.

“기관들도 전체를 형성하지만, 이 전체는 부분들을 통일하지도 전체화하지도 않으며, 부분들 곁에 있는 전체로서 산출된다.”

‘부분들의 곁에 있는 전체’라는 말이 솔깃하지 않은가!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논고』(1665)에서 “민중은 왜 자신의 예속을 영예로 여기는가?”를 물었고,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그런 물음에 빗대어 “대중은 왜 억압을 욕망하는가?”를 따진바 있다. 사회든 국가든 계급이든 권력으로서의 전체는 부분을 예속화하려 한다. 뿐만 아니라 부분도 전체의 부분으로서만 자유를 획득하려는 든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히 오류다. 68혁명에서 개별적 주체들은 이러한 전체와 부분의 ‘전체주의적 권력구조’를 수정하고자 했다. 들뢰즈가 68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이유이다. 마찬가지로 1980년대 한국사회의 변혁적 현실에서 정현도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졌다. 정현의 조각적 사유를 작품에서 연역적으로 찾는다면 그것은 들뢰즈가 따졌던 ‘욕망’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억압을 욕망하는’ 주체들. 그러나 그는 그 주체들의 전체보다는 부분에 주목함으로써 억압을 해체시킬 수 있었다.

정현은 조각의 부분들을 전체에 예속시키지 않았다. 전체는 부분들의 곁에 있는 것으로 족하니까. 아니 전체는 부분을 위해서만 존립할 수 있다. 그의 작품들을 보면(특히 아스콘으로 제작한 작품들) 전체라는 ‘유기적 덩어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각각의 개별적 부분들을 ‘형성시켜’ 잇거나 덧대고 조립하며 그저 배치할 뿐이다.

억압된 신체의 탈주

초기 작품들은 석고와 마닐라 삼으로 엮은 신체를 통해 ‘억압을 욕망하는’ 인간을 조형화 했다. 기관 없는 신체로서 이 조각들은 스피노자가 ‘예속을 위해 투쟁하는 민중’이라고 지적했던 기묘한 자유의지를 엿보인다. 조각의 각 부분들이 전체와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적극적인 해방의 출구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신체들은 ‘육체’와 구분되지 않을 만큼 육질적이다. 어쩌면 그의 신체는 신체에 의해서만 신체를 획득할 수 있는 자기모순에 빠져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인간의 형상을 구체적으로 갖춘 신체만이 신체로서의 형상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그런 믿음으로서의 모순.

그러나 침목과 아스콘으로 이어지는 행보는 억압을 해방시키려는 그의 의지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육중한 침목을 도끼와 전기톱으로 흩뜨린 뒤 다양한 형상으로 재배치 한 점이나 또는 도로공사를 위해 뜯어낸 아스팔트 아스콘을 도려내고 썰어서 마치 몇 개의 섬처럼, 산처럼 배치했으니. 설령 그것의 전체 형상이 인간의 신체를 유추해 낼 수 있다손 치더라도 석고를 엮거나 두들겨서 만든 작품과는 다르다. 그것은 하나의 분출이고 폭발이며, 해방이고 탈주이기 때문이다.

철근 작품들에 이르면 그의 신체가 ‘인간의 신체’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보여준다. 이제 그의 신체는 모든 것들의 신체로 열려진 셈이다. 모든 부분들이 모든 존재들이고 그 존재들 사이에 전체가 흐르고 있다. 신체는 하나의 다리, 팔, 머리처럼 하나의 가지, 하나의 꽃, 하나의 대나무, 하나의 돌이 된다. 이러한 사유는 동아시아의 오래된 철학이기도 한데, 17세기 조선의 학자 강백년은 “도로써 천지를 보고 천지로써 만물을 본다면, 나我 또한 물物이요, 물은 또한 나이다. 천지는 또한 만물이요, 만물은 또한 천지이다. 어떤 물이 나가 아니겠으며, 어떤 나가 물이 아니겠는가. 그런즉 내 몸이 하나의 태극太極일 뿐 아니라, 만물 또한 하나의 태극이며, 물물物物이 저마다 하나의 태극을 지니고 있다. 천지 또한 하나의 태극인 것이다.”라고 했다. 인간과 만물이 일체이며 저마다 하나의 주체라는 얘기다. 그는 인간 혹은 사유하는 ‘나’만이 주체가 아니라, 모든 생명, 모든 존재가 주체일 수 있다는 평등안을 견지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현의 조각적 사유가 넓어지는 지점에 그런 미학적 배경이 있는 게 아닐까.

정현의 조각은 조각으로서가 아니라 조각의 해방을 위해 읽을 때 더 깊어진다. 그의 조각은 신체를 더 넓은 곳으로 탈주시킴으로써 자유를 얻는다. 그리고 그렇게 해방과 탈주의 드넓은 초원에서 그는 비로소 조각이 아닌 조각, 정의될 수 없는 조각, 하나의 물음이며 의문이 되는 조각을 상상하고 있다. 바로 그 지점에서 그와 조각, 작품의 매개 고리가 끊기면서 또한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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