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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물질의 물질적 유비

조은정 · 미술평론가 · 『아트인컬처』

조각가 정현과의 대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힘’이다. 나는 그가 ‘힘’이란 단어를 사용할 때마다 무형의 강렬한 어떤 것을 물질로 형상화 한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는 분명 사전에서 설명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강렬하게 내부에서 솟구치는 무형의 에너지이자 그로 인해 다르게 변해버린 결과로서의 물체 자체로서 ‘힘’이란 언어를 채택하는 것이었다.

전시장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커다란 무쇳덩어리를 마주하였던 학고재의 개인전에서, 공간에 설치된 조각의 수보다 벽에 걸린 드로잉이 더 많았던 것은 그래서 당연해 보인다. 쇠를 때려 부수는 쇠공, 쇠의 부식을 막는 돌과 나무가 녹아내려 형성한 끈적하고 검은 액체 타르(tar), 타르가 스며들어 타르 자체처럼 보이는 침목(枕木). 응축되어 밀도가 높아져 폭발적 에너지를 갖게 된 물질들이 벽에서, 공간에서, 바닥에서 놀랍게도 부드러운 형상으로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 다른 물성들을 관통하는 원리는 에너지의 드러냄, 힘이었고 그것의 형식화에 집중되고 있었다.

벽에 걸린 일련의 드로잉들은 직접적으로 인간의 얼굴을 떠올리게 하거나 그렇지 않을 때조차 영혼의 형식화, 정신을 형상화하는 태도 자체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압축시킨 것이다. 특유의 냄새와 함께 돌과 비벼져 열과 압력이 가해져 돌처럼 견고하고 유연한 도로의 아스콘이 된 타르는 그 끈끈함의 성질로 종이와 쇠에 스며들어 인간의 모습을 드러낸다. 얼기설기 엮어 골조로 표현된 인체, 각목으로 쳐대어 드러난 인간의 형상 등은 인간의 외형이지만 아니기도 하다. 그 극단의 형상들은 지치지 않는 정신, 인고의 세월에 대한 흔적이기에 ‘형상화한 태도’의 어떤 것인 때문이다.

업악구조로 점철된 한국을 벗어나 프랑스에서 직면한 ‘태도’에의 요구에 그는 각목으로 석고를 무작정 패고 두들겨 감정을 드러내는 것으로 답하였다. 형태의 깨부숨이 도리어 형상이 된 것은 도로포장을 제거하던 길거리에서 들고 온 아스콘 조각을 바닥에 널부러뜨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십여 년간 뜨거운 마찰열과 무게를 감당해온 침목을 기찻길에서부터 받아 들고 와 도끼로 살을 발라내던 때도, 전봇대와 철근을 이어붙인 나무를 땅속에 박아세울 때도 어떻게 정신을 형상화할 것인가 즉 ‘영혼의 형식’화에 천착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물체에 ‘힘을 가해온’ 작가가 주물공장의 도구인 쇠공을 들고 와 전시장에 놓기까지에는 고심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2006), 100년 후에도 잊히지 않을 작가(조선일보 2008), 한국평론가협회 창작 부문 수장자(2009)가 선택한 ‘쇠공’은 물질에 대한 작가의 간섭 부재에 대한 비판이라는 위험도 예견되기 때문이다. 그런 우려를 불식하고 쇠공들은 그의 작업의 연장선에 놓였다. 두들기고 파내고 용접하는 행위가 감정의 드러냄이라면 물체 자체의 ‘흔적’은 물질과 에너지의 대결을 구체화한 형식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는 조각에서의 에너지를 “하찮은 것에서 발견되는 신성함, 날 것에서 나오는 생명력, 예측을 불허하는 이미지, 느닷없음, 비탄으로부터의 해방, 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헤매임들의 깊이”(박수진과의 대화)라고 정의내렸다. 그런 점에서 쇠공의 등장은 질료적인 만남이나 조우(遭遇)와는 다른 해방, 자유와 같은 상징의 틀을 입게 된다.

공사장에서 버려지는 각목으로 형상화된 인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뜯겨지는 아스팔트, 설치 기한이 지나면 버려지는 침목, 주물공장에서 용도폐기된 철근과 이제는 사라지는 전봇대 그리고 육중한 무게로 다른 쇠들을 변형시킨 쇠공이 긁히고 닳아 형태가 변하여 공중에서 내려지는 시점. 거기에 작가는 간여한다. 그 용도폐기의 순간에 물질은 작가의 정신을 입고 질료화 한다. 크기와 무게감, 시각적 체험만으로도 느껴지는 단단함으로 압도하는 쇠공은 날것이 주는 자유, 하찮은 노동의 신성함을 일깨운다. 노동가치가 끊임없이 하락하는 현대 한국사회에서 ‘조각가 정씨’가 선택한 쇠공은 꽤 괜찮은 노동자로서의 우리를 새삼 대면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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