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이 최근 몇 년간 관심을 기울여 온 재료는 대부분 '별것 아닌 것'들이다. 쓸모를 다한 철도 침목이거나, 쓰임을 기다리는 석탄이다. 어째서 별것 아닌 것에 끌리는가. 그것들은 이미 쓰였거나 쓰이는 중이라 세련되지 않았다. 단순하고 투박하다. 사실 진실한 것은 단순하고 투박하다. 갓 만들어진 것은 중심을 꿰뚫지 못한다.
그래서 그가 쓰는 재료는 중심에서 밀려났거나 아직 중심에 이르지 못한 것들이다. 여기서 '중심'이란 실용적 가치를 말한다. 정현은 실용성을 박탈당한 재료에서 미적 가치를 빚어내려 한다. 이 재료들이 실용적 가치 이전과 이후에 존재로서 주어진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무엇인가'이며 동시에 '아직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서 자기 존재를 주장할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작가는 실용성과 구별되는 미적 생명을 확보하려 한다.
그에게 재료는 더 이상 한낱 사물이 아니다. 그는 재료에 주체적 존재의 자리를 부여한다. 동시에 형상인(形相因)에서 벗어나 실체적 원인으로 그것들을 또렷이 구현한다. 마침내 재료는 자신의 존재를 본래의 모습 그대로 실현해 줄 사람, 정현을 만난다. 그의 손을 거쳐 재료는 천천히 제 몸과 얼굴을 드러낸다. 팔을 벌리고 서 있거나 손으로 버티고 선 것은 인간이 아니라 침목이다.
누워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아스팔트다. 침묵에 잠긴 어두운 사물은 인간의 얼굴이 아니라 석탄의 얼굴이다. 작품의 명목상 주인은 작가 자신이지만, 실제 주인은 쓰인 재료다. 스스로를 깨울 힘이 없는 재료에, 작가는 손과 힘을 빌려주어 다시 태어나게 한다. 재료 안에서 찾지 못한 길은 재료 밖에서도 결코 찾을 수 없다.
오직 작가의 서술만이 재료에 생명을 불어넣어 의미 있는 작품을 빚는다. 작가에게 재료는 수단이다. 재료 자신에게는 그것이 목적이다. 그 목적은 작가의 미적 감수성을 빌려 실현된다. 그래서 침목, 아스팔트 콘크리트, 석탄, 철판을 쓴 연작에서 드러나는 외적 측면뿐 아니라, 각 재료에 깃든 이야기를 끌어내는 내적 측면에도 방점이 찍힌다.
나는 정현 작품의 이러한 특성을 '자연주의적 서사성'이라 부른다. 정현의 정신과 작품에 깃든 이 고유하게 한국적인 자연주의적 서사성에 온 세계가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란다. 다만 내 관심은 그 자연주의적 서사성의 '내용'에 있다. 정현이 '한국의 조각가'로 당당히 자신을 소개하려면, 그의 작품 내용에 '한국적 명랑함과 흥겨움'의 요소가 더해지기를 바란다.
그의 작품 서사는 전체적으로 어둡고 침울하다. 한국은 그저 슬프고 비장하기만 한 나라가 아니다. 민담과 설화에 담긴 해학과 풍자는 밝고 유쾌한 세계의 이야기를 전한다. 재료가 무겁다고 해서 내용까지 무겁고 비장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 한구석에서 솟아오르는 희망의 메시지를 보게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