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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 그리고 조각의 긍정

김원방 · 미술평론가 · 영문판 번역

정현 조각 속의 인간 형상

정현의 조각은 흔히 '인체 조각'으로 분류되어 왔다.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1992년 첫 개인전 이래의 작업, 2000년 무렵 침목으로 구성한 작업, 이번 김종영미술관 전시를 위해 준비한 아스팔트 콘크리트 작업, 그리고 드로잉에 이르기까지 두루 살펴보면, 인체의 형태가 그의 예술을 알아보게 하는 특징임은 분명하다.

작가 자신도 자신의 작업이 인체 연구에서 출발했으며 여전히 인체의 조각적 재현이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그는 '조각을 통해 인간과 인체를 다시 들여다보고 재해석하려 한다… 인체로 할 일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그것은 결코 지나간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작업은 또한 '위기와 절망 앞에 선 인간의 실존적 상태'나 '겉껍질을 한 꺼풀 벗겨 낸 오늘의 우리 자화상'으로도 널리 읽혀 왔다.

때로는 그의 작업을 설명하기 위해 '금욕주의(stoicism)' 같은 용어가 제시되기도 한다. 특히 침목으로 구성한 작업은 일종의 오랜 '금욕'과 관련지어 논의된다. 정현 자신도 '침목은 위에서 기차가 짓누르고 아래에서 자갈이 파고드는 가운데 오랜 세월 눈보라와 비바람을 견뎌 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 말한 바 있다. 정현의 조각이 인체 및 인간 실존과 관련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그 작업에는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

정현의 작업에서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인체와 인간 실존, 다시 말해 작업의 인간적·구상적 측면이 작업의 궁극적 목표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작업에서 인체의 형태는 그저 희미하고 미묘한 존재감만을 지니며, 삽으로 흙을 빚어 떠낸 석고 작업, 도끼와 전기톱으로 깎은 침목 오브제, 그리고 이번 전시의 아스팔트 콘크리트 조각이 보여 주듯, 인체는 재료를 향한 격렬한 조각 행위 속에 거의 파묻혀 버리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인체의 형태와 인간적 요소는 정현 조각의 부분적 측면을 이룰 뿐이며, 이 부분적 측면에 대한 비판적 기술이야말로 정현 작업의 특질을 연구하는 출발점으로 보인다. '정현의 조각은 어느 정도까지 인체에 관한 것인가', '인체는 어떻게 스스로를 드러내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인체가 아니라면 이 작업은 또 무엇에 관한 것인가' 같은 물음을 던짐으로써, 우리는 '인체/비(非)인체', '조각의 현전/조각의 부재'라는 구조화된 경계의 역동적 이동 속에서 그의 작업을 식별하고 분석할 수 있다.

프랑스 유학 시절, 정현은 한국에서 해 오던 사실주의적 조각을 버리고 각목과 쇳덩어리, 삽 같은 도구로 흙을 거칠게 빚기 시작했다. 작가는 이 시기를 아카데믹한 조각을 뒤로한 전환점으로 여긴다. 그는 인체를 단지 '대상'으로 사고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그의 조각은 인체 재현이라는 목적론적 관심에서 돌아서서 '인체가 설정한 제한된 조건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놀이'의 형태를 띠기 시작한다.

인체가 단지 '대상'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인체의 형태가 최종 목표가 아니라는 뜻이지, 그의 작업이 인체에서 완전히 등을 돌린다는 뜻은 아니다. 정현의 이전 작업은 물론 전기톱으로 뜯어낸 아스팔트 콘크리트 덩어리로 만든 새 작업에서도, 아무리 희미할지언정 주검과도 같은 인체의 윤곽이 자리한다. 이 인체의 현전은 돌무더기를 쌓아 놓은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이는 '한 걸음 물러선 구상 조각'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 조각적 후퇴는 새로운 측면을, 곧 인체와 그 인간적 외형에 초점을 둔 인식론적·지성적 독해가 놓쳐 온 핵심 요소들을 끌어낸다. 두드러지는 것은 격렬하게 뒤엉킨 춤이라 할 만한 것이다. 재료에 가해지는 힘과, 그 힘에 저항하는 재료 사이의 춤. 꿰뚫리고 켜진 응축된 돌무더기, 잘려 나간 아스팔트와 돌의 단면 — 이것들이 바로 그 춤의 현현이다.

그러나 정현의 작업이 오로지 재료의 미학이나 재료의 표현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앵포르멜이나 추상 조각의 미학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정현의 고유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재료와의 이 춤을 위한 장(場)이자 동시에 그 한계를 마련해 주는 일종의 무대가 있다는 점이다. 그 무대가 사실은 인체의 형태이며, 재료와의 춤은 오직 이 무대 위에서만 펼쳐진다.

이로써 그의 작업은 어느 한쪽 극단으로 환원되지 않고 물질성과 형상성, 몸과 정신을 함께 지켜 낸다. 나는 이 둘을 함께 품는 특성을 가리켜 '전체 조각(Whole Sculpture)'이라 부르고자 한다. 나아가 이러한 존재론적 위치를 '조각적인 것'으로 개념화할 수 있다.

'전체 조각'의 사이버네틱스: 인체에서 몸으로

재료와의 격렬한 춤이 겨냥하는 것은 인체의 복제가 아니다.

인체의 형태는 무용수 정현이 세운 임시 무대일 뿐이다. 무용수의 일이 무대의 형태를 베끼는 데 있지 않듯, 무대는 무용수의 관능적 운동 한가운데서 이따금 혹은 우연히만 제 경계를 의식하게 된다. 전체 조각의 총체성(게잠트쿤스트베르크 개념과는 무관하다)은 춤과 그 무대, 곧 조각적 재료의 미학과 그 재료가 표상하는 형태를 함께 보존한 결과다.

정현의 조각적 형태는 분명 실존적 견딤의 격렬한 과정을 떠올리게 하지만,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전체의 보존을 지탱하는 춤의 강렬함과 견딤에 진정 주목해야 한다. 그것이 사실은 조각 그 자체의 강렬함이자 견딤이다. '전체 조각'의 현장에는 인체로 이르는 두 갈래 길이 있다. 하나는 '재현된 인간 형상', 곧 '인체'이며, 다른 하나는 그러한 인체 및 그 재료와 더불어 춤추는 무용수(곧 작가와 관객의 관계에서의 주체)다.

전자가 시각적 지각의 대상에 불과하다면, 후자는 오직 '지금 여기'에서 일인칭 '나'로서 존재한다. 후자는 '바로 이 순간 내 앞에 놓인 아스팔트 덩어리의 날카로운 굴절에 감각적으로 몰입한, 직접 참여하는 나'다. 침목 작업을 시작했을 때 정현은 과연 재료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지 스스로 묻곤 했다. 이와 관련해 조각가들은 흔히 '재료가 저항한다'는 표현을 쓴다.

이러한 표현은 물질의 자연 상태를 늘 인공적 형태로 바꾸어야만 하는 남근적(phallic) 문화와는 무관하다. 오히려 '이긴다', '저항한다'는 말은, 차가운 시각성을 넘어 대상과 신체 감각을 주고받는 일종의 '사이버네틱스'를 표현하려는 조각가들의 현장 용어다. 정현은 그 조각적 사이버네틱스의 현장을 지치지 않고 보존하며 강조하는 작가다.

정현 작업의 핵심은 인체의 문제가 아니라 몸의 문제다. 비록 이 몸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와 대상 사이에 격렬한 상호 교환이 일어나는 내 현전의 온 영역을 가리킨다. 정현의 재료는 아슬아슬한 균형과 재료의 자기 보존, 그리고 재료에 가해진 엄청난 무게의 흔적이 만들어 낸 소용돌이에 휘말린 채, 누군가의 얼굴이나 자세를 베끼려는 듯 끝없이 분투한다. 조각은 본래 '재현과 그에 반항하는 재료 사이의 상호작용'이었다(미켈란젤로와 메다르도 로소를 떠올려 보라). 그러나 미술사에서 대다수의 조각은 어느 한쪽의 극단적 승리를 추구했다.

사실주의 조각에서는 '특정한 인체', '어떤 행동을 묘사하는 자세', '어떤 역사적 사건'을 만들어 낸다는 인식론적 목적을 위해 조각의 사이버네틱스적 움직임이 흔적도 없이 지워진다. 반대로 미니멀리즘 같은 경우에는 인체의 형태가 제거되고, 과도한 자의식 상태에 놓인 재료 그 자체가 드러난다. 정현은 이 두 극단이 뒤엉킨 현장을 보존한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흔히 구상 조각이라 여기는 것이 이미 거기 있었거나(먼저 존재했기에 지금의 상태는 그 인체가 파괴된 형태로 읽힌다), 앞으로 이루어질 것 같은(그래서 곧 사실적인 인체가 모습을 드러내리라 기대하게 되는) 상태다. 이전과 이후의 성질을 동시에 지닌 이 상태를 되도록 오래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정현 예술의 과제다. 그처럼 위태로운 자리에 놓인 조각이 바로 '조각의 실재'이자 '전체 조각'이기 때문이다.

같은 분석을 정현의 드로잉에도 적용할 수 있다. 그의 드로잉은 조각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사람의 머리 모양을 그린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끈적한 먹으로 가한 힘의 흔적, 반복되는 선, 그 '머리'에서 터져 나오는 에너지가 보인다. 이 모든 요소는 도끼와 톱날이 남긴 날카로운 자국을 지닌 그의 조각에서 느껴지는 것과 같은 생리적 흥분과 고동치는 리듬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서도 정현은 사람의 머리를 주어진 대상으로 여길 뿐이다. 드로잉은 어떤 에너지를 내뿜는 사람 머리의 형태를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격렬한 신체적 사이버네틱스 한가운데서 간헐적으로 지각되는 무대의 경계일 뿐이다.

정현 드로잉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일종의 영화적 애니메이션의 성질을 지닌다는 점이다. 드로잉을 필름 릴처럼 차례로 늘어놓으면 한 장 한 장은 영화의 스틸 사진 같지만, 한데 모아 보면 머이브리지의 인체 동작 연구나 조이트로프를 떠올리게 하는 움직임의 전개가 나타난다. 이 움직임의 감각은 나의 모든 생리적 감각을 동원해 읽는 일, 곧 체험하는 일에서 비롯되며, 그것이 정현 작업의 사이버네틱스다.

조각의 긍정을 향하여

올해의 '오늘의 작가' 전이 정현의 작업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그의 작업에 따라붙어 온 비평적 수사들이 아예 사라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더 넓은 맥락에서 다시 검토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과감히 인체 하나만을 추구하는 작가'나 '현대 사회에서 낙담한 인간 정신의 초상' 같은 표현은 비평 이론의 관점에서 본 주제론적 논의에 지나지 않는다. 그보다 그의 작업은 조각 그 자체에 대한 깊은 탐구와 직관을 비롯한 고유한 방법론, 그리고 초기작부터 지금에 이르는 전혀 다른 실험들이 딛고 선 더 큰 전제로 주목받아 마땅하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가 '낡은 인체 조각가가 아니라 매우 전위적인 개척자'임을 알아보게 된다.

형식 미학이나 낭만적 상징주의를 둘러싼 논의에 쉽게 휘말리는 구상 조각이라는 장르에서, 정현의 작업은 중층적 읽기의 가능성과 신체적 사이버네틱스를 강조함으로써 '조각 그 자체의 힘'과 '조각의 실재성'으로 초점을 되돌린다. 그것은 니체가 말한 '긍정'을 지향한다. 긍정은 승인이나 설득 같은 이성적 행위가 아니라,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본래의 전체성을 온전히 회복하는 신체적 운동을 동반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정현은 조각이라는 매체 자체에 대한 바로 그 긍정을 통해, 그리고 그 긍정을 다시 긍정하기 위해, 매번 맨 처음에서 시작하는 반복의 조각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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