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의 조각은 인간의 형상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예로부터 인체는 중요한 소재였다. 특히 고전 미술에서 인간의 형상은 이상적 아름다움을 함축하는 주제로 다루어졌고, '우주의 축소판'으로 인식되곤 했다. 그러나 정현이 표현하는 인체는 그러한 전통 조각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의 작품은 형태가 거칠고, 동원되는 방식은 격렬하며 때로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이 '길들지 않은 강렬함'은 재료뿐 아니라 인간 존재의 실재성을 더해 주는 중요한 요소다. 먼저 재료의 실재성은 석고, 침목, 아스팔트 콘크리트 같은 재료의 물성이 고스란히 노출되는 그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특성이다. 석고 작업은 가소성이 높은 흙덩어리를 쇠막대나 삽 같은 도구로 치고 파내어 만든다.
이런 폭력적인 과정 덕분에 작품은 단단한 형상을 갖춘다. 분명 인체나 얼굴의 형태이지만, 거기서 구체적인 형상을 찾아내기는 어렵다. 전통적인 살붙이 도구로 신체의 외형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재현하던 방식을 거스름으로써, 작가는 굳어 버린 재현의 전통, 곧 아카데미즘에서 벗어난다. 오랜 세월 무거운 철로를 떠받치다 버려진 침목이나 현대 도시의 상징인 아스팔트 콘크리트로 빚은 인체 조각 역시 폭력적이고 거칠며 표현주의적이다.
전기톱이나 그라인더 같은 강력한 도구로 침목이나 아스팔트 콘크리트를 켜고 잘라 표면의 질감을 드러낸 작업은, 재료의 물질적 실재성을 극도로 강조해 제시된다. 이런 작품을 통해 우리는 최소한의 인간 형상뿐 아니라 재료 그 자체의 실재성도 경험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조각에 대한 작가의 사유와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행위,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형태가 하나로 묶여 조화로운 전체를 이룬다는 사실이다.
재료를 거의 폭력적으로 다루는 듯한 그의 격렬한 작업 과정은, 그러나 재료의 물성을 제거해 '승리'를 거두려는 공격이라기보다 어떤 측면에서 재료와 하나가 되려는 암시적 특성을 드러낸다. 정현은 이 노동의 과정을 '재료와 놀기'라 표현한다. 어쩌면 그것은 작가의 감정과 사유, 이념이 재료의 생생한 물성과 합일되는 일종의 신들림, 혹은 그 연장(延長)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작가가 빚은 형상은 신이 존재하던 시대의 토템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아무리 재료를 거칠게 다룬다 해도, 작가는 한 번 버려졌던 재료를 다시 버리지 않는다. 침목과 아스팔트 콘크리트는 제 물성과 특성을 훼손당하지 않은 채, 작품의 주된 요소로서 제자리에 선다. '재료와 놀기'는 그가 재료를 지배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재료와 하나로 어우러지려는 작가의 의도를 드러낸다. 작가가 빚은 인간 형상은 우리에게 특정 대상을 떠올리도록 지시하지 않는다. 다만 침목이나 아스팔트 콘크리트가 자아내는 정서적 감응이 축적된 시간, 곧 고난을 견뎌 낸 시간이자 제 몫을 다하려 묵묵히 인내한 침묵의 시간이기에, 그의 인간 형상은 존재의 실재를 드러낸다. '시간의 숙성'으로 닳고 해졌으나 여전히 존엄을 지키는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곱씹게 하기 때문이다.